양국주 선교사 레이놀즈 선교사(이눌서) 삶 재조명
▲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인 양국주 선교사가 강사로 초청되어 레이놀즈 선교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 강경구 |
| 목포기독교 120주년 기념 강연회는 우리예닮교회와 목포기독교단체가 주최하고 있으며, 목포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관하고 있다. 1894년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서 남긴 선교 일기 공개를 중심으로 4월 18일 금요일 정확히 120년이 지난 그 시간인 오전 10시에 목포 우리예닮교회(최창현 목사)에서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인 양국주 선교사가 강사로 초청되어 레이놀즈의 삶이 재조명된다. 행사에 대한 문의는 김양호 목사 (010-2222-7179), 후원계좌는 농협 653012-56-108656(김양호)이며, 오후는 양동 기독교유적지 탐방이 예정되고 있다.
호남선교의 초석을 다졌던 “7인의 선발대”
▲ 1892년 8월 남장로교에서는 테이트와 레이놀즈, 그리고 전킨을 한국 초대 선교사로 선정하였고, 여기에 4명의 여성이 가담하여 조선을 향해 떠나는 미국남장로교로써는 대단한 선교적 모험이 시도되었다. © 강경구 |
| 호남선교의 시원을 열었던 유진 벨 선교사는 미국남장로교 소속으로 1895년 4월에 제물포로 입국했고, 오웬 선교사가 1898년 11월 6일에 입국했다. 이들보다 앞선 1892년 8월 남장로교에서는 테이트와 레이놀즈, 그리고 전킨을 한국 초대 선교사로 선정하였고, 여기에 4명의 여성이 가담하여 조선을 향해 떠나는 미국남장로교로써는 대단한 선교적 모험이 시도되었다. 4명의 여성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전킨의 부인 레이번(Mary Leyburn), 그리고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7인의 선발대”라고 불렀다. 7인의 선발대는 1892년 9월 7일 미국을 출발하여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는 1892년 10월 18일, 나머지 6인은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미국 남장로교 주도의 한국 선교가 1892년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한국 도착 2년뒤인 레이놀즈의 행적
▲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 강경구 |
|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했던 드루 선교사와 함께 광활한 원시림의 땅인 호남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전도하던 중 도착한 남도의 끝자락 목포에서의 삶이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인 양국주 선교사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2012년 9월 묘비도 없이 잡초와 오랜 세월속을 쇠락하고 있었던 레이놀즈 선교사의 묘를 발견했던 그가 이번에는 레이놀즈 선교사의 친필 일기를 발견한 것이다. 양국주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레이놀즈 후손을 찾아가 이 유서를 찾아냈고, 이를 처음으로 한국교회에 공개했다. 1894년 4월 18일... 정확히 120년전의 일기다.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10시였다. 바로 목포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시간이다. 120년이 지난 2014년 4월 18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한 외국인 선교사의 열정적인 삶을 회고하는 뜻깊은 자리다.
레이놀즈 선교사(이눌서, 李訥瑞, William David Reynolds, 1867~1951) 레이놀즈(이눌서)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으로는 1892년 한국에 파송된 첫 선교사다. 1893년한국 장로교의 첫 치리회라 할 수 있는 장로교선교부공의회 초대 회장이 됐으며, 당시 척박한 조선사회의 언어와 풍습에 적응이 빨랐던 레이놀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당시 그들 부부는 말을 타고 전주, 김제지역과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등지를 오가면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1895년엔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어 게일 선교사와 함께 한글성경번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예레미야를 제외한 구약성경 38권과 신약성경의 고린도전‧후서 등 40권을 번역하는 등 천재적인 언어 구사와 번역 실력을 조선복음화에 쏟아부었다.
1910년 4월 2일 ‘번역 다 되었소’ 내용의 전보 보내와...
▲ 말을 타고 오지를 오가면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
| 1900년 드디어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이후 1902년부터 1906년까지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 역사적인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레이놀즈가 히브리어에도 정통하였던지라 1910년 구역성경의 출판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 및 한국 장로교 치리회 구성 작업에 참여했으며, ‘12신조’로 알려진 한국장로교회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1917년엔 평양으로 파송되어 1937년 조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목회자 양성에 헌신했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제자로 현재 가장 고령인 방지일 목사가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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