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기사글

'호남선교' 유진 벨 선교사家 이야기(2)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1. 31. 12:58






'호남선교' 유진 벨 선교사家 이야기(2)
호남선교 110년 광주 교회사의 출발을 알린 유진벨
 
강경구
호남선교 110년 광주 교회사의 출발을 알린 유진벨
▲ 초창기 유진벨 선교사의 모습     © 강경구
1895년 4월 조선땅을 밟았던 유진벨 선교사는 1925년 9월 노환으로 30년간의 정든 광주를 떠났다. 1895년의 조선은 청일 전쟁후 콜레라가 전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유진벨이 제물포를 통해 한반도에 도착한 이후 최초사역은 고종 황제로부터 콜레라 퇴치 참여에 대한 요청이었다. 당시의 한반도는 무지와 문맹이 휘몰아치는 눈발처럼 참혹하게 시야를 가리우던 오지의 땅이었다. 원시의 풍토병과 공포스러웠던 폐렴과 결핵, 콜레라가 난무하던 죽음의 각오가 필요했던 땅, 조건없이 찾아와 풀어놓은 보따리 속 복음(福音)은 한반도에 한줄기 빛이 되었고 의미가 되어 무구한 세월을 가로질러 오늘에 이르렀다. 한 올 한 올 백년의 시간을 벗겨내면 선뜻 그리움이 되어 나부낄 거룩한 이름들의 무덤 앞에 앉아 난 가만히 그들의 묘비를 들여다 본다.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이 곳... 양림동산은 깃발처럼 하늘을 나부끼며 나와 우리를 손짓하는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그리움이며, 가슴가득 솟구쳐 오르는 눈물이 되어 구겨진 화선지 같은 인생을 펴주는 진실이 묻어 있는 곳이다. 광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오웬과 유진벨 선교사가 선교 기지를 개척한 때가 1904년 12월이니 이 양림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100년전 먼 광주의 풍광은 무딘 가슴을 떨게하는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두렵고 낯선 존재들이었던 타국 선교사들이 들고 온 큼지막한 보따리에서 복음이 분수처럼 피어오르고 가난과 질병, 무지와 계급의 차등에 몰려 태어나고 죽음이 무의미였을 수도 있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전해진 복음은 10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복음화를 향한 전진기지로써의 역할을 다하는 선교강국이 되어있음에 이들의 죽음 앞에 서있음이 어찌 의미없다 할 수 있겠는가?


고 백경홍 목사(광주제일교회)도 생전 호남 선교의 발자취 지대한 관심
▲ 고 백경홍 목사    
1904년 12월 25일, 광주제일교회가 세워졌던 당시는 눈내리던 성탄절이었다. 그후로 109년이 지난 지난해 10월 19일 광주제일교회 제 15대 당회장인 백경홍 목사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광주제일교회 교회설립 96년이 지난 2000년 12월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13년간 그는 광주의 어머니 교회로 100년된 최초교회의 부담을 마음에 두고 늘 기도하고 눈물흘렸던 온유하고 사려심이 깊었던 목회자였지만 향년 56세로 광주제일교회 묘지가 있는 화순 제일동산에 평소의 유지를 받들어 평신도들과 함께 소천하는 순서대로 영면했다. 제일교회 당회장이었던 이기풍, 김창국, 선재련, 한완석 목사 등의 곁이 아닌 평신도들이 배정된 곳에 묻힌 것이다. 그는 항상 호남 교회 100년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생전 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고 백경홍 목사가 밝힌 내용이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유진벨 선교사(Rev. Eugene Bell)가 당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사택에서 광주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드린 이후 110년이 코앞이다. 1906년 6월 북문 안 교회 설립, 12년 봄 김윤수, 최흥종 초대 장로 장립, 16년 8월 이기풍 목사 제 2대 담임목사취임, 19년 11월 남문 밖 금정 101번지에 북문 안에 있던 ㄱ자 예배당을 뜯어다가 옮겨짓고 입당했던 금정교회, 21년 6월 제3대 남궁혁 목사 취임, 22년 4월에는 시인 김현승 선생의 부친인 제4대 김창국 목사 취임과 당시 여성 선교사로 조선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서서평 선교사가 1922년 12월 26일에 부인조력회를 창립했었다. 대략 서서평 선교사의 삶까지를 논하면서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던 백경홍 목사는 자신의 사역기간중 반드시 광주 최초교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을 기도제목으로 가지고 있다” 고 고백 했었다.

유진벨 가문 4대에 걸친 한국사랑...
▲ 유진벨 가문     © 강경구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유진벨의 둘째 딸 샤롯 벨(1899-1974), 유진벨의 외손자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 유진벨의 외증손자 스티브 린튼(Steve Linton, 인세반)과 막내 아들인 존 린튼(John Linton, 인요한)에 이르기까지 유진벨 가문과의 한국 인연은 깊고도 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내용이 있다. 당시 미국의 남장로교는 교육과 의료 사역에 중점을 두었고 선교지 내정 간섭이나 문화적인 충돌은 적극 피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는 철저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북장로교가 신사참배에 크게 문제를 두지 않았던 것과는 달랐다는 지적이 있다. 1937년 샤롯 벨은 남편인 윌리엄 린튼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결국 강제 출국을 당했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전주 신흥고를 비롯하여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모든 학교들이 폐교 조치를 당했다. 1934년 4월 1일 제5대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던 유화례 선교사가 1937년 9월 6일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를 주도했던 때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열하고 위험했던 1930년대 한반도
▲ 1930년대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으며, 한반도는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절망감에 휩싸인 교회들이 하나둘 궁성요배에 참여했다.     © 강경구
1930년대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으며, 한반도는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도쿄 교외 관병식에서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향해 분노의 수류탄을 던졌고, 같은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졌다. 나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태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국운은 어디에도 없었던 슬프고 뼈아픈 시대였다. 극기야 1937년엔 중일전쟁, 41년엔 태평양전쟁 등 한반도의 자유의 꿈은 30년이 지나도록 요원하기만 했다. 1936년 8월부터는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1신사(神社) 원칙하에 궁성요배가 강요됐다. 이은 황국신민화정책으로 1938년 내선일체 구호아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기시켰으며, 1938년부터는 한국어 사용이 금지됐고,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기에 이르렀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사 교육이 전면 금지되며 일본역사에 편입되는 굴욕과 함께 창씨개명이 1939년 11월부터 실시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보이지 않는 신(神)에 대한 절대와 헌신을 가르쳤던 푸른눈의 선교사들이 숨지거나 일본에 쫓겨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의 발톱을 전면에 내세우며 한반도를 뼈속까지 잠식했다. 절망감에 휩싸인 교회들이 하나둘 궁성요배에 참여했다. 아직까지도 일본은 허황된 꿈을 현실화시키며 하나도 변하지 않는 속되고 추한 군국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고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전쟁이라는 가미가재식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1930년 심훈(沈熏)은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으며, 1935년엔 장편 〈상록수, 常綠樹〉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평생 한국의 복음화를 꿈꿨던 유진벨의 위기와 아픔
▲ 양림동산에 가면 유진벨의 치열한 삶을 읽어볼 수 있다.     © 강경구
1901년 4월 전주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임신 7개월의 부인이 심장병으로 위독하다는 것이었고, 곧이어 선교활동 도중 군산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로테 벨은 서울 양화진(양화대교 근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벨은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년후인 1903년 마가렛트 벨과 혼인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가렛트 벨마져 1919년 3·1 독립운동때 일본헌병들에 의한 방화로 수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한 제암리 교회 현장을 돌아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만 했다. 1921년 9월 줄리아 디저트 선교사와 혼인한 유진벨은 언제나처럼 다시 광주로 돌아온다. 광주가 그의 집이었고 고향이었다. 양림동을 향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호남 선교의 큰 산맥이었다. 어쩌면 그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타고온 배는 바울의 유럽 복음화를 향한 대장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4년뒤인 1925년 9월 28일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 유진벨은 양림동산 오웬의 옆에 안장됐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광주 수피아여고 교정에는 커티스 메모리얼홀이 있다. 바로 '유진 벨 선교사의 기념예배당'으로 유진벨이 우리에게 남겨준 사랑과 은혜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1921년에 지어진 건물은 기증자였던 커티스의 이름을 따 '커티스 메모리얼홀'이라고 했지만 1955년 회의를 열어 호남 선교의 선구자인 유진벨을 기리는 뜻에서 건물명을 '배유지 기념예배당'으로 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곳은 1층은 살림집이었고,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져서 당시 선교사들이 매 주일 오후 4시가 되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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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26 [16:20]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