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벨, 윌리엄 린튼, 휴 린튼에 이르기까지
▲ 휴 린튼 선교사 (Hugh M. Linton, 인휴)와 로이스 선교사(인애자) © 강경구 |
| 한적한 순천의 어느 시골마을 비포장된 도로 위를 요란하게 지나가는 낡은 지프 한 대에 남도민의 삶의 숨결이 움트고 있었다. 길이 있는 곳엔 그가 있었다. 그가 지나는 곳에는 복음이 열렸다. 그리고는 새로운 희망이 넘실거렸다. 숨막히는 더위와 가난과 삶의 멍에에 눌려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그가 전한 것은 예수의 복음이었다. 남도의 주요도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신은 검정고무신 자국이 찍여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흔적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깊은 울림이 되어 남도의 여기저기 생명처럼 배여있다. 바로 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이다. 1926년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유진벨 선교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샬렛 벨 린튼의 삼남이었던 그는 군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유진벨 선교사는 그토록 갈망했던 한국의 해방을 못 본채 1925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유진벨 선교사가 떠나기 3년 전에 맞아들인 사위가 바로 휴 린튼의 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이다. 휴 린튼은 14세의 나이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부모들과 함께 1940년 11월 4일에 추방됐었다. 그는 그때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어스킨 대학에서 공부하였고(1944~1947), 1950년 컬럼비아 신학교를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1950~1953)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던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그만의 투쟁이었고, 자신의 젊음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했던 간절한 기도의 결과였다. 한국전쟁때는 안식년을 이용하여 미 해군 장교로 다시 참전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뼈속까지 한국인일 수 밖에 없는 그의 선택은 1953년 한국에서 군 전역후 생생한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검정 고무신의 싣고 남도를 활보한 복음 전도자
▲ 휴 린튼이 신고 다녔던 검정고무신... © 강경구 |
| 전라도 순천은 여수를 경계로 보성, 구례, 고흥, 벌교 등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휴린튼이 생각했던 농어촌 복음화를 위한 최고의 거점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깝거나 먼 섬으로, 항구가 있는 어촌 마을로, 산골로 복음의 거점을 마련해나갔다. 보통 일주일 단위안에서 전도가 계획됐지만 어쩔때는 10일씩, 한 달씩 농어촌 순회전도를 감행했다. 섬 오지와 산간 벽지를 순회하며 그가 세운 교회만도 600곳이 넘었다. 전남을 중심으로 전북 내륙과 경남 해안 지역까지를 아울렀던 그에게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릴 수 있는 낡은 지프 한 대와 시골사람들과 만날 때 눈에 띄는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전부였다. 멀고먼 시골길을 달려 복음전도를 감행할 때는 벼룩, 빈대들 속에서 고단한 육신의 쉼을 얻어야 했고, 전도여행시 그의 주식은 길거리에서 살 수 있는 고구마와 풀빵 등이었다. 파란눈의 외국인이 섬마을을 드나들며 오물거리고 먹는 고구마나 풀빵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평소에 지녔던 전도의 지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진다. 그가 신고 다녔던 검정고무신은 닳고 닳아 구멍이 뚫어지기 일쑤였고, 타이어 수리하듯 땜질을 해서 신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자녀들중 생존해 있는 둘째 아들 스티브 린튼(Steve Linton, 인세반, 1950- )과 막내 아들인 존 린튼(John Linton, 인요한, 1959- )역시 검정고무신을 신어야 했다. 가난속에 사는 민중을 보듬고 스스로 청빈과 나눔의 미덕을 통해 복음을 일깨운 고마운 선교사였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에 걸친 광양 간척 사업으로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소통의 역할도 했다.
회초리 가정교육은 물론 폐결핵 치료에 초석이 됐다. 가정 교육에 있어서도 휴 린튼 부부는 매우 엄격하여 가차 없이 매를 들곤 했다. 잘못하면 밥을 굶기는 조금은 ‘징’한 전라도 사람이었다. 아내 로이스 역시 회초리로 훈육했던 엄한 어머니였다. 자녀들은 그녀를 바다의 폭풍같이 무서운 벌을 주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5남 1녀의 자녀들은 중학생이 되면 107문답의 소요리 문답을 외워야했고, 암송하다 틀리면 매를 맞았다. 삶의 가치관 정립을 위한 휴 린튼만의 교육방법이었다. 전라도의 많은 섬과 벽지에서 활약하며 초교파적으로 600여 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했던 그는 개척초기의 교회들의 자립을 위해서 운영비의 20%를 지급하며 자립을 돕는 등 남도의 마을 입구마다 세워지는 교회 십자가의 불빛을 세상을 향해 비추이게 하는 밑거름이 되주었다. 1962년 순천 일대의 큰 수해로 인한 결핵을 막기 위해 부인 인애자 선교사와 함께 결핵진료소와 요양원를 세우기도 했다. 휴 린튼이 선교사역에 역점을 둔 반면, 아내 로이스 선교사(인애자)는 의료 봉사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로이스는 결핵 퇴치에 목숨을 걸었다. 수많은 이재민과 결핵 환자가 급증했다. 자녀들까지 폐결핵에 걸려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1965년 입원 요양이 필요한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결핵 요양원’이 설립되었고, 무의탁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인 ‘보양원’이 세워졌다.
한국형 엠블런스 보급사업의 시원 인휴 선교사는 1984년 4월 10일 뜻밖의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음주운전을 하던 버스와 추돌사고로 휴린튼 선교사는 오랜 복음의 도구였던 집(Jeep)차를 운전하던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게 된다. 광주 기독병원까지 숨막히는 후송이 이루어지지만 택시에 실려가는도중 소천했다. 이 사건후 그의 아들 인요한 박사는 한국형 Ambulance 보급사업을 펼쳤으며, 순천은 한국에서 가장 좋은 엠블런스 운영 체제를 갖추게 된다. 사고당시 휴 린튼은 지프차에 농촌 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서 시골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그의 가문이 가지고 있는 선교역량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 휴린튼의 아내였던 로이스 선교사는 한국인의 결핵 치료와 예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1996년 호암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 오천만 원이 존 린튼(인요한) 박사의 한국형 앰뷸런스 개발과 보급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한국민을 위한 한국민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고 갔다. 그의 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은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터라 1948년 대학 설립 준비에 착수했었고, 1950년 전쟁으로 설립이 지연되었지만 1954년부터 2년여의 준비후 1956년 대전에 대전 대학을 설립했다. 이 기간중에 자신의 몸의 상태를 알고 있었지만 윌리엄 린튼은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고도 완치가 되기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학 사업을 마무리 한다. 1960년 좋지 않은 건강에도 여전히 학교일에 열정을 불태웠고, 주일은 시골 교회에 나가 봉사하기를 쉬지 않았다. 휴린튼의 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21세에 내한하여 48년 동안 500개의 교회를 세웠고, 그의 아들 휴린튼은 남도의 섬 오지와 산간 벽지를 순회하며 60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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