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료 선교의 정신을 만든 포사이트
▲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안에는 포사이트의 길이 있다. ©강경구 |
|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되는 포사이트는 1910년경에는 목포의 변요한 선교사와 함께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매일 400~500명씩 진료했다고 한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제주 의료선교시 동행한 조수들 중 일부를 제주도에 남겨두고 진료에 힘쓰도록 했을 정도로 가난한 자와 병든 자, 특히 나환자들을 돌보는데 삶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계속되는 제주도 의료봉사 활동은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지역에 1908년 입성 후부터 제주지역에 불어닥친 복음화의 열풍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5년동안 남긴 헌신적인 사랑은 한센병 관리사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로서는 의술이나 의료 환경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선교가 국가의 시책을 주도하며 당시 사회적인 여론을 압도하여 복음의 가치를 사회전반에 포괄적으로 남기는 중요한 소통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사회적인 약자였던 소외되고 혐오스러웠던 환자들을 위해 살신성인 하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사이트는 결코 쉬지 않았다.
▲ 오웬 선교사의 부인(Mrs. Clement G. Owen)이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The Leper and the Good Samarita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남장로교회 본부에 보낸 선교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세상에 알려졌다. © 강경구 |
| 100년이 지난 지금 이제 한국과 광주의 교회들은 좀 더 구체적인 사회복음의 혁신적인 방안들을 내놓아야만 한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희생하는 모습으로 교단과 교회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회의 발전과 계층간 소외를 극복해낼 수 있는 봉사의 롤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십이 지금 한국과 광주 교회에는 너무도 절실하다고 밖에... 1911년 고향으로 돌아간 포사이트는 결코 쉬지 않았다. 남은 생애의 희미해진 삶의 가닥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맞추었다. 나약해지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금 복음의 현장으로 자신의 육신을 끌고 나갔다. 고통으로 인한 포기와 지친 육신이었건만 1918년 5월 9일 마지막 순간까지도 광주를 마음에 새기고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한 시간들이었다. 목숨을 걸었던 한국에서의 5년간... 그렇지만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에서 산 역사가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파송이후 그가 목포에 세운 선교병원인 부란취(French)병원에서 태어난 서봉(瑞峰) 국영종(鞠永棕)은 1930년 의사 국순홍의 아들로 한국 의학사 신장부분에 족적을 남기고 있으며, 국립소록도 나환자병원에서 일생을 마감하면서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일컫던 故 신정식 박사의 책상에도 선교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는 최흥종 목사, 예수님의 사진과 함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웬, 포사이트, 최흥종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사람들... 포사이트의 정신은 그대로 최흥종에게 전수되어 호남선교의 기치를 들게했다. 최흥종은 포사이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자신의 재산을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부지로 내놓는 등 예수의 사랑은 그대로 광주의 밑바닥에 용해되어 흐르고 있다. 이제 누가 그 사랑을 부등켜 안고 광주와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것인가? 누가...
포사이트가 지나온 그 길에서 한국민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순간을 선물받고 있다. 오웬은 순교후 정든 사역지를 떠나 천국에 오르면서까지 광주에 귀한 선물을 주고 간 것이다. 왜냐하면 포사이트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양림동으로 오는 그 시각 오웬 목사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고, 제중병원에 뒤늦게 도착한 포사이트는 의료선교사였던 윌슨을 찾아가 거리에서 만난 한센병을 심하게 앓고 있던 여성의 치료와 거처를 부탁했던 것이다. 포사이트의 행동에 감명 받은 윌슨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병원시설을 염두해두기 시작했으며, 1912년에는 드디어 광주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병원이 지어졌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포사이트 선교사의 귀하고 아름다운 선행이 4년만의 결실로 이어졌고, 봉선리는 한센병 환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치료의 여망을 여는 출발점이 되주었다. 신기하게도 첫 나병환자를 뉘였던 침상은 순교한 오웬 목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대였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했다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오웬 선교사 부인이 보낸 선교편지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 광주 양림동산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하늘... 아래 호남신학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 강경구 |
| '포사이트'(W. H. Forsythe) 뒷골목 주먹 ‘망치’였던 최흥종의 마음을 열었다. 오웬의 급성폐렴은 당시 광주선교부를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고갔다. 유진벨 선교사나 윌슨 선교사에게 오웬의 존재는 큰 산과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진벨은 오웬과 함께했던 광주선교부 개척의 일로 상당히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 긴박했던 순간 유진벨은 오웬의 치료를 위해 영산포를 지나 광주읍 직전 효천에 들어서고 있는 포사이트를 위해 김총순과 최흥종을 보냈다. 많은 문헌들을 들여다보았지만 이 대목에서 두가지 의견으로 나뉘고 있다. 1909년 목포에서 출발한 것을 김총순과 최흥종이 마중을 나간 것인가? 아니면 1904년 12월인가의 문제인데 1904년 8월 10일 군산에 도착해서 전주 예수병원에서 사역을 시작 했던 이유로 포사이트가 1904년 12월 목포에 있었다는 내용은 설득력이 없게되며, 1906년 미국으로 치료차 갔다는 것도 포사이트의 최흥종과의 만남에 어느정도 실마리를 주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포사이트의 한센병 환자의 치료는 후일 1909년 4월 3일 남편 오웬 선교사가 죽은 다음에 오웬 선교사의 부인(Mrs. Clement G. Owen)이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The Leper and the Good Samarita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남장로교회 본부에 보낸 선교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세상에 알려졌다.
▲ 호남선교의 획을 그었던 오웬과 포사이트의 의료선교의 맥을 잇고 있는 광주 기독병원이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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