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재발견> 태백산맥모델 ‘보성여관’ |
2017년 09월 11일(월) 17:19 |
|
<도시재생의 재발견> 태백산맥모델 ‘보성여관’
글 사진 강경구 객원기자
1935년 건립된 ‘보성여관’ 벌교의 문화명소로 재탄생
한해 찾는 관광객만 만여 명... 옛 모습 복원해 역사교육현장 활용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태백산맥’ 기억하며 걷는 문화의 거리 곳곳 ‘설렘’
녹차수도 보성 향 은은하고 득량만 지나자 쫄깃한 꼬막정식 식당 북적
송곡 안규동 선생의 복내 지나 보성IC 거쳐 벌교 도착
오늘 목적지는 벌교 보성여관이다. 광주에서 벌교까지 가기위해 복내를 경유하고, 보성IC 지나 벌교로 가는 길로 정했다. 목적지까지 시원스럽게 내달리는 차창 밖으론 일명 쌀밥나무인 색색의 배롱나무가 ‘징허게’도 한창이다. 복내면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송곡체’의 대가 이자, 글씨 속에 깃든 ‘정신’을 중요시 여겼던 송곡 안규동 선생의 올곧은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기에 잠시 들렸다.
복내서 벌교까지 20분, 설마했지만 고속도로 지나니 꼬막정식 간판이...
여기서 벌교(筏橋)까지가 20분이다. 筏(뗏목, 떼 벌)과 橋(다리 교)로 일명 ‘떼다리’인 벌교는 지금의 ‘홍교’나 ‘소화다리’ 훨씬 이전 벌교천을 연결하는 나무 다리가 있어 일명 ‘떼다리’였고, 이것이 지명의 유래가 됐다. 이후 이 다리는 잦은 범람과 여자만으로부터의 조수로 인해 만조시 바닷물 피해가 심각했다. 결국 숙종 44년(1705)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땟목다리 대신 석교를 만들었고, 다리의 모양이 무지개와 같아서 홍교라 불렀다. 8월 중순 폭염의 절정을 버티고 서있는 홍교 위로 하나 둘 사람들이 지난다.
소설 태백산맥 속 김범우가 심각한 좌우대립 속을 고뇌하며 건너던 석교 옆, 여기에도 배롱나무 꽃은 절정이다. 소설의 첫 권 태백산맥1(1부 한의 모닥불)이 ‘해냄’에서 출판됐을 때가 1986년 10월 5일이었다. 좌파와 우파 이전 좌익과 우익이라는 공포스런 단어 앞에서 떨어야 했던 시기의 벌교와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바로 소설 ‘태백산맥’이며 그 중심에 보성여관이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30년동안 850만부 판매 기록
제석산 초입에서 광활한 이야기인 태백산맥의 첫 장을 연다. 조정래 선생의 대장정 앞에서는 일일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오랜 숙고(熟考)와 고뇌가 지금 벌교에서는 뜻밖의 선물이 됐다. 그의 소설을 느껴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계절 벌교를 찾아와 소설 속의 주인공을 찾고 있다.
벌교는 이렇게 찾는 이들을 위해 매년 새롭게 단장하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특히 조정래의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배여 있는 이야기들이 벌교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태백산맥은 지난 30년동안 85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벌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100년 전의 건물과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국면을 접할 것이 분명해진다.
보성여관에서 구 벌교금융조합, 홍교, 김범우의 집, 소화다리, 태백산맥문학관, 소화의 집, 현부자집, 중도방죽, 벌교역, 다시 보성여관까지 문학 속을 걷자 근대사의 어두운 면면이 청아한 가을빛과는 대조적으로 복잡하고 어두운 기억 속을 헤집고 올라온다.
부용산 오리길... 안치환의 노래까지... 1박 추천
그리고 또 한사람의 벌교인. 지난 2006년 타계한 ‘부용산’ 작사한 박기동 시인이다. 안치환의 노랫가락이 아득하다. 그만큼 아픔과 질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벌교에서 8월은 더워도 덥지 않다. 빨치산이 자주 불렀다하여 ‘빨치산 노래’라는 오해로 최초 작사자였던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를 겪었다. 좋아했고 아꼈던 누이동생을 벌교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가슴절절하게 써내려갔던 시가 바로 ‘부용산’인데 슬픈 제망매가였던 시 부용산 때문에 박기동은 모진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 시를 노래로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와 ‘해당화’의 작곡가이기도 한 남평 출신 안성현 선생 역시 활발하게 재조명되고 있어 다행이다. 벌교에서는 만나야 할 사람과 가봐야 할 곳이 많아 꼭 1박을 추천하고 싶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보성여관이다.
폭염의 여름을 피해 들어간 보성여관, 자유라는 소중함 ‘아메리카노 한 잔’
염상구가 이 맛을 상상이나 할까? 스스럼없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더위를 식힌다. 창밖으로 바삐 사람들이 오간다. 더운 여름날 지치지도 않는 듯 벌교를 찾는 사람들... 대한민국이 걸어온 아픈 근대사를 마주하는 눈빛이 새롭다. 슬프고 아린 일제시대와 6.25, 그리고 당시의 역사를 지배했던 좌우 이데올로기는 저 유모차 안에 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되물림 되지 말아야 할 슬픈 유산이다. 아직도 우리는 걸어야만 할, 아직 걷지 못한 역사의 칼날 끝에 서있다. 역사를 잊은 미래는 결코 생각할 없는 것이 아닌가?
김범우, 염상진, 그리고 토벌대장 임만수와 청년단 염상구, 계엄군사령관 심재모, 이어 등장하는 백남식, 소화와 정하섭 등... 한 잔 커피를 나누며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들과 두루두루 인사를 나눈다. 역사가 오랜 만큼 이야기도 깊다. 이렇듯 여관에서는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일이 만져보고 읽어볼 수 있는 여유까지 선물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132호인 ‘구 보성여관’은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소설 태백산맥에서 소개되는 남도여관‘의 실제모델인 구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은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손잡고 지난 2012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열었다.
구 보성여관은 1935년 건립된 2층 건물로 그동안 여관과 상가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근대건축사적·생활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문화재로 등록됐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문화유산국민신탁을 문화재관리단체로 지정했고, 2009년 12월부터 2년간 옛 모습 복원을 통해 보성여관은 역사교육의 산실로, 벌교의 문화 명소로 재탄생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는 보성여관은 숙박동 7개의 온돌방이 관광객을 맞는다. 일반실 8만원, 특실 10만원, 귀빈실 15만원으로 화장실과 별도의 작은 방과 요리까지 가능하도록 리모델링됐다.
복원사업 이전 주인이었던 나종필 씨가 20년을 근무한 벌교남초등학교 퇴직 후 1979년 5만원에 매입했던 곳에서는 선거때마다 여관 2층에 단상을 놓고 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벌교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는 이유를 폭염 속에서 확인한다. 차량이 지체되고 우회하며 벌어지는 한낮 문화행사가 벌교의 오랜 골목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럽지만 정겹고 재밌다. 구 보성여관이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적 가치가 있는 이유는 지금 한 해 찾는 만여명의 관광객이 말해주고 있다.
보성여관, 지척에 있는 골목길 걷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고...
보성여관에는 전시실, 다다미방, 카페, 자료실, 소극장까지 다양하다. 건물 외관을 그대로 보전하고 실속 있는 구성으로 오는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태백산맥길 19에 위치해 오롯히 80여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여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려있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시간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다다미 방에 올라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창문을 열고 탁트인 벌교를 바라보기도 한다. 어떤이는 1층 소극장 대관을 묻기도 하고, 천원을 내고는 여관 내부와 자료실을 둘러보기도 한다.
매 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연과 태맥산맥 연극, 동요부르기, 다도체험, 전통국악공연 등이 다채롭게 열리고 있어 찾는이들에게는 심심찮은 볼거리를 주고 있다.
그러고보니 멀리 벌교를 품고 있는 득량만이 지척이다. 득량만은 이순신 장군이 최후 결전을 앞두고 군사들을 먹일 식량을 극적으로 얻었던 곳이다. 得粮(얻을 득, 식량 량), 이곳에서 그는 조선 수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이다. 녹차수도 보성... 차향이 그윽하다. 지척인 낙안 오래된 읍성이 십분 거리에 있어 차분하게 방향을 잡았다. 잠깐 다녀올 수도 있을 정도의 거리이기에 저녁을 벌교 꼬막정식으로 예약하고 길을 나선다.
보성-벌교-낙안 하루가 긴 8월이 유독 짧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 사진 강경구 객원기자
1935년 건립된 ‘보성여관’ 벌교의 문화명소로 재탄생
한해 찾는 관광객만 만여 명... 옛 모습 복원해 역사교육현장 활용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태백산맥’ 기억하며 걷는 문화의 거리 곳곳 ‘설렘’
녹차수도 보성 향 은은하고 득량만 지나자 쫄깃한 꼬막정식 식당 북적
송곡 안규동 선생의 복내 지나 보성IC 거쳐 벌교 도착
오늘 목적지는 벌교 보성여관이다. 광주에서 벌교까지 가기위해 복내를 경유하고, 보성IC 지나 벌교로 가는 길로 정했다. 목적지까지 시원스럽게 내달리는 차창 밖으론 일명 쌀밥나무인 색색의 배롱나무가 ‘징허게’도 한창이다. 복내면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송곡체’의 대가 이자, 글씨 속에 깃든 ‘정신’을 중요시 여겼던 송곡 안규동 선생의 올곧은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기에 잠시 들렸다.
복내서 벌교까지 20분, 설마했지만 고속도로 지나니 꼬막정식 간판이...
여기서 벌교(筏橋)까지가 20분이다. 筏(뗏목, 떼 벌)과 橋(다리 교)로 일명 ‘떼다리’인 벌교는 지금의 ‘홍교’나 ‘소화다리’ 훨씬 이전 벌교천을 연결하는 나무 다리가 있어 일명 ‘떼다리’였고, 이것이 지명의 유래가 됐다. 이후 이 다리는 잦은 범람과 여자만으로부터의 조수로 인해 만조시 바닷물 피해가 심각했다. 결국 숙종 44년(1705)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땟목다리 대신 석교를 만들었고, 다리의 모양이 무지개와 같아서 홍교라 불렀다. 8월 중순 폭염의 절정을 버티고 서있는 홍교 위로 하나 둘 사람들이 지난다.
소설 태백산맥 속 김범우가 심각한 좌우대립 속을 고뇌하며 건너던 석교 옆, 여기에도 배롱나무 꽃은 절정이다. 소설의 첫 권 태백산맥1(1부 한의 모닥불)이 ‘해냄’에서 출판됐을 때가 1986년 10월 5일이었다. 좌파와 우파 이전 좌익과 우익이라는 공포스런 단어 앞에서 떨어야 했던 시기의 벌교와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바로 소설 ‘태백산맥’이며 그 중심에 보성여관이 있다.
|
제석산 초입에서 광활한 이야기인 태백산맥의 첫 장을 연다. 조정래 선생의 대장정 앞에서는 일일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오랜 숙고(熟考)와 고뇌가 지금 벌교에서는 뜻밖의 선물이 됐다. 그의 소설을 느껴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계절 벌교를 찾아와 소설 속의 주인공을 찾고 있다.
벌교는 이렇게 찾는 이들을 위해 매년 새롭게 단장하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특히 조정래의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배여 있는 이야기들이 벌교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태백산맥은 지난 30년동안 85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벌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100년 전의 건물과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국면을 접할 것이 분명해진다.
보성여관에서 구 벌교금융조합, 홍교, 김범우의 집, 소화다리, 태백산맥문학관, 소화의 집, 현부자집, 중도방죽, 벌교역, 다시 보성여관까지 문학 속을 걷자 근대사의 어두운 면면이 청아한 가을빛과는 대조적으로 복잡하고 어두운 기억 속을 헤집고 올라온다.
부용산 오리길... 안치환의 노래까지... 1박 추천
그리고 또 한사람의 벌교인. 지난 2006년 타계한 ‘부용산’ 작사한 박기동 시인이다. 안치환의 노랫가락이 아득하다. 그만큼 아픔과 질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벌교에서 8월은 더워도 덥지 않다. 빨치산이 자주 불렀다하여 ‘빨치산 노래’라는 오해로 최초 작사자였던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를 겪었다. 좋아했고 아꼈던 누이동생을 벌교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가슴절절하게 써내려갔던 시가 바로 ‘부용산’인데 슬픈 제망매가였던 시 부용산 때문에 박기동은 모진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 시를 노래로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와 ‘해당화’의 작곡가이기도 한 남평 출신 안성현 선생 역시 활발하게 재조명되고 있어 다행이다. 벌교에서는 만나야 할 사람과 가봐야 할 곳이 많아 꼭 1박을 추천하고 싶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보성여관이다.
|
염상구가 이 맛을 상상이나 할까? 스스럼없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더위를 식힌다. 창밖으로 바삐 사람들이 오간다. 더운 여름날 지치지도 않는 듯 벌교를 찾는 사람들... 대한민국이 걸어온 아픈 근대사를 마주하는 눈빛이 새롭다. 슬프고 아린 일제시대와 6.25, 그리고 당시의 역사를 지배했던 좌우 이데올로기는 저 유모차 안에 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되물림 되지 말아야 할 슬픈 유산이다. 아직도 우리는 걸어야만 할, 아직 걷지 못한 역사의 칼날 끝에 서있다. 역사를 잊은 미래는 결코 생각할 없는 것이 아닌가?
김범우, 염상진, 그리고 토벌대장 임만수와 청년단 염상구, 계엄군사령관 심재모, 이어 등장하는 백남식, 소화와 정하섭 등... 한 잔 커피를 나누며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들과 두루두루 인사를 나눈다. 역사가 오랜 만큼 이야기도 깊다. 이렇듯 여관에서는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일이 만져보고 읽어볼 수 있는 여유까지 선물하고 있다.
|
소설 태백산맥에서 소개되는 남도여관‘의 실제모델인 구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은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손잡고 지난 2012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열었다.
구 보성여관은 1935년 건립된 2층 건물로 그동안 여관과 상가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근대건축사적·생활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문화재로 등록됐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문화유산국민신탁을 문화재관리단체로 지정했고, 2009년 12월부터 2년간 옛 모습 복원을 통해 보성여관은 역사교육의 산실로, 벌교의 문화 명소로 재탄생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는 보성여관은 숙박동 7개의 온돌방이 관광객을 맞는다. 일반실 8만원, 특실 10만원, 귀빈실 15만원으로 화장실과 별도의 작은 방과 요리까지 가능하도록 리모델링됐다.
복원사업 이전 주인이었던 나종필 씨가 20년을 근무한 벌교남초등학교 퇴직 후 1979년 5만원에 매입했던 곳에서는 선거때마다 여관 2층에 단상을 놓고 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벌교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는 이유를 폭염 속에서 확인한다. 차량이 지체되고 우회하며 벌어지는 한낮 문화행사가 벌교의 오랜 골목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럽지만 정겹고 재밌다. 구 보성여관이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적 가치가 있는 이유는 지금 한 해 찾는 만여명의 관광객이 말해주고 있다.
보성여관, 지척에 있는 골목길 걷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고...
보성여관에는 전시실, 다다미방, 카페, 자료실, 소극장까지 다양하다. 건물 외관을 그대로 보전하고 실속 있는 구성으로 오는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태백산맥길 19에 위치해 오롯히 80여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여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려있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시간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다다미 방에 올라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창문을 열고 탁트인 벌교를 바라보기도 한다. 어떤이는 1층 소극장 대관을 묻기도 하고, 천원을 내고는 여관 내부와 자료실을 둘러보기도 한다.
매 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연과 태맥산맥 연극, 동요부르기, 다도체험, 전통국악공연 등이 다채롭게 열리고 있어 찾는이들에게는 심심찮은 볼거리를 주고 있다.
그러고보니 멀리 벌교를 품고 있는 득량만이 지척이다. 득량만은 이순신 장군이 최후 결전을 앞두고 군사들을 먹일 식량을 극적으로 얻었던 곳이다. 得粮(얻을 득, 식량 량), 이곳에서 그는 조선 수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이다. 녹차수도 보성... 차향이 그윽하다. 지척인 낙안 오래된 읍성이 십분 거리에 있어 차분하게 방향을 잡았다. 잠깐 다녀올 수도 있을 정도의 거리이기에 저녁을 벌교 꼬막정식으로 예약하고 길을 나선다.
보성-벌교-낙안 하루가 긴 8월이 유독 짧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 ![]() ![]() ![]() |
'2017년 기사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활용 건축물-오랜 전통이 묻어나오는 근대 건축물의 미래가치 (0) | 2018.01.26 |
---|---|
<건강의 새패러다임> 강경구교수와 함께하는 대체의학 (0) | 2018.01.26 |
[테마명소] 국내 유일 내륙 등대 ‘영산포등대’ (0) | 2018.01.26 |
[테마명소] 담양의 ‘담빛예술창고’ (0) | 2018.01.26 |
<테마명소> 곡성역 (0) | 2018.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