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명소] 국내 유일 내륙 등대 ‘영산포등대’ |
2017년 10월 12일(목) 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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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명소] 국내 유일 내륙 등대 ‘영산포등대’
국민가수 이미자의 맑은 노랫가락이 영산강 굽이굽이 흘러 흘러 보일 듯 말 듯 끝없이 흘러 만 간다. 호남의 젖줄, 영산강... 그 영산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영산포(영산포)의 하루가 고즈넉하다. 멀리 택촌과 앙암바위(아망바우)가 짙어가는 오후 한나절 영산강을 투영하고 반영(反影)을 가로지르는 돛단배가 세월을 무심히 앞서 간다.
1915년 설치 이래 100년의 시간 속을 건너뛰며
영욕의 역사 비쳐온 ‘영산포등대’
홍어의 거리로부터 황토 돛단배, 만무방의 작가 오유권의 탯자리
영산나루,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에서 느끼는 아픈 탐욕의 역사
죽전골목, 일본식 가옥, 영산포 교회 등 문학과 관광도시로 ‘꿈틀’글·사진 강경구 칼럼니스트
나주시 영산포에 대한 두가지 설
고려 말 극성스런 왜구들의 잦은 노략과 침탈을 피해 영산포로 이주해 온 흑산도 주민들이 그리운 고향 땅에 있었던 섬 ‘영산도’를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 ‘영산마을’이었다는 설과 영산강, 영산포 모두 나주 땅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흑산도의 주변섬인 영산도와는 무관하다는 두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나주목편>에 소개된 군과 현들에 대한 설명에서 나주목에 금성산과 남포진, 흑산도(영산현)가 있다는 기록을 증거로 오히려 영산포가 현재 흑산도 부근에 있는 영산도 지명의 모태라는 설이다.>
영산포는 1876년 개항 이후 이주해 들어오는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의 전기를 맞이했다. 목포와 나주, 광주를 잇는 최고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일제에 의해 영산포 일대는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관공서와 금융·행정기관이 세워졌고, 목이 좋은 수탈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14년경은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개폐식 목교가 세워졌으며, 선창에서 산 고등어 2마리 혹은 2전의 통행료로 다리를 건너는 시기였다. 1989년에는 영산포 대홍수 이후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한 장벽이 세워지기도 했다.
일제시대 백미(白米)침탈 위한 본거지
일제는 나주평야에서 수탈해온 쌀 도정을 위한 정미소들을 곳곳에 세웠고, 당시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이 산재한 원정통(元町通) 거리로 인한 풍광이 그럴싸해 90년대 전국을 강타한 영화 ‘장군의 아들’과 ‘죽도록 사랑해’가 촬영되기도 했다.
선창가에는 등록문화재 제129호(2004.12.31 지정)인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가 영산강을 굽어보고 있다. 1915년 설치된 등대는 수위 측정과 내륙 등대의 기능을 겸하며 바쁜 뱃사람들의 삶을 비추었던 것이다.
바다도 아닌 곳에 등대가 세워진 배경. 그 이유만으로도 영산포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런 등대 100여 미터 뒤편으로는 동양척식회사 문서고가 세워져 당시 나주평야 일대에서 수탈한 쌀과 농산물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국내 유일의 강변 등대. 1915년 설치 이래 100년의 시간 속을 비추며 영욕의 역사를 지나왔다.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으로 목포에 건설된 영산강 하구언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제 다시 그 쌓인 100년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영산포의 부활을 보기위해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영산포 선창 복원을 위한 ‘근대거리 조성계획’ 등 ‘영산포등대’와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그리고 영산포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끝없는 탐욕 끝에 4년만에 대부호가 되어 만든 구로즈미 가옥이 황포돛배, 홍어 등과 함께 영산포에서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다.
영산포의 상징처럼 수려한 가을 담아내는 ‘영산나루’
팬션과 찻집으로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영산나루’는 영산포의 상징처럼 수려한 가을을 담아내고 있다. 250년 된 나무의 충만한 깃 아래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 청아한 하늘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가을볕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직도 한참인 보랏빛 맥문동과 붉은 상상화의 도도함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마음껏 선물받는 이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움…. 이 따스한 모성애를 느끼는 따사로운 가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것이지만 일제의 잔인무도함과 잔학함이 곳곳에 배인 역사적 생채기를 떠올리자니 극도의 피로감마저 엄습해 온다.
36년은 길고 길었다. 시대의 질곡을 간직한 영산포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문순태의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을 따라 지나는 영산포 선창가, 죽전골목, 삼영동, 이창동, 그리고 석기네. 영산포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구진포 나루, 새끼내(석기내) 옆 가야산까지. 그러고보니 왜구의 침략을 용인하지 않았던 거센 물살의 영산강을 품고 있는 앙암바위의 기품이 영묘하고 예사롭지 않다. ‘장성 큰 애기가 오줌만 싸도 초가집들과 농경지를 휩쓸어 갔다’는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는 영산포, 홍수에 무방비였던 영산포의 가난과 깡촌의 면모는 영산포 시인 나해철의 시에서 그 깊이를 더한다.
문순태, 나해철, 오유권 쟁쟁한 문학가들과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邑內)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榮山浦)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영산포(榮山浦)1>
구구절절 뼈가 저리도록 사무치는 시어들이다. 그 누님의 울음과 가난 말이다. 80년대 까지도 여성의 대학 진학은 요원했다. 중학교를 나와도 옆에 있었던 영산포여상을 진학하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교육보다는 공장으로 농촌보다는 도시로 가족의 생계와 가난을 면하기 위해 영산포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가난한 동네였다.
그 처절한 가난과 싸우며 오로지 한 곳을 바라보았던 또 한명의 영산포 사람. 오유권 문학의 산실 영산포, 그 까닭없이 오랜 시간을 서있어야 했던 영산포 등대에서 그가 잠시 몸담았던 영산포 우체국까지 한번 더 걸음을 재촉한다. 우체국 뜰 안에서 작가로서 길을 선택하고 직장을 사직하고 떠났던 선생을 바라보았던 유년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부친과는 인생의 동반자였다는 그는 바른말하기로도 유명했다 들었다.
이제 다시금 문학과 관광도시로 새롭게 꿈틀거리는 영산포를 마음에 담고 250년 된 오래된 나무 옆에 소담하게 자리잡은 영산나루 펜션에서 1박을 청하기 위해 방향을 잡는다.
영산포 옛노래를 뉘와 함께 불러보나?
영산강 둔덕에 서서 다리건너 영강동 창랑정과 금성산 자락의 초가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보면 이곳은 문학의 도시다.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조선 선조때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명문장가였으며, 이조정랑, 북평사, 예조정랑을 지낸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의 기념관이 있다. 백호의 문학관을 마주하고 있는 앙암바위.. 아무리 봐도 목마름을 달래는 한필의 말이 서있는 듯 한 느낌이다. 나이 사십도 되지 않아 임종한 백호의 슬픈 임종이 느껴진다. 영산포, 왕곡, 다시, 공산. 이곳의 목마름은 해결되었는가? 그가 남긴 유언은 “곡‘(哭)하지 말라”였다.
어쩌면 경남 통영의 동피랑에 견줄 수 있는 특별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와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곳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픈 질곡의 역사와 가난의 오랜 설움을 씻어 내며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경을 보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죽전골목을 지나 골모실에 이르는 비교적 기다란 골목길이 결코 머지 않을 것이다.
그 골목 끝자락에 민노당 국회의원을 지낸 고 곽정숙 국회의원의 생가도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있다. 어쩌면 영산포가 더 이상 쇄락한 포구의 작은 도시가 아닌 역사와 문학, 음식과 힐링을 소재로 하는 관광도시로의 발전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경국대전’, 영산포구에 선박 53척 일시에 정박
곳곳에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은 그리움과 추억의 장소가 아닌 아픔과 질곡의 잔재일 뿐이다. 1981년 말 목포 하구둑에 막혀 뱃길을 닫았고, 이제는 온전하게 흐르지 못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세곡 보관을 위한 ‘영산창’이 있었고, 백미를 실어 날리던 번창한 포구에는 ‘경국대전’의 내용을 빌리자면 선박 53척이 일시에 도열했다는 내용으로 영산포구의 위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문헌과 현장을 비교하며 걸을수록 새롭고 특별해진다.
‘풍류락도 영산가람길’로 나주만의 독특한 걷기 체험길 1-7길이 지금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노동하듯이 작품을 썼다”는 영산포 골모실 태생의 작가 오유권 선생의 치열하고 수려한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영산포를 소개하자니 저절로 힘이 난다.
‘백지에 작품을 써서 공책에 옮긴 다음에 원고지에 옮겨 썼다’는 오유권 선생의 문학세계는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고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품인 ‘소문’ 등 장편소설 8편과 중·단편 200여 편 총 213편의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영산포의 청명하기 만한 하늘을 별이 되어 수놓고 있다.
아직도 독자들에게 오유권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만무방>이라는 영화를 검색해보면 된다. 1960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소설 <이역의 산장>을 영화화한 것으로 6·25전쟁 말미에 접전 지역에 있는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그린 영화로 변장호 감독, 윤정희, 장동휘, 김형일 등이 주연한 영화다. 어디 그의 작품이 그 한편이던가. 200편이 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그의 고향 영산포였을 것이다.
국민가수 이미자의 맑은 노랫가락이 영산강 굽이굽이 흘러 흘러 보일 듯 말 듯 끝없이 흘러 만 간다. 호남의 젖줄, 영산강... 그 영산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영산포(영산포)의 하루가 고즈넉하다. 멀리 택촌과 앙암바위(아망바우)가 짙어가는 오후 한나절 영산강을 투영하고 반영(反影)을 가로지르는 돛단배가 세월을 무심히 앞서 간다.
1915년 설치 이래 100년의 시간 속을 건너뛰며
영욕의 역사 비쳐온 ‘영산포등대’
홍어의 거리로부터 황토 돛단배, 만무방의 작가 오유권의 탯자리
영산나루,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에서 느끼는 아픈 탐욕의 역사
죽전골목, 일본식 가옥, 영산포 교회 등 문학과 관광도시로 ‘꿈틀’글·사진 강경구 칼럼니스트
나주시 영산포에 대한 두가지 설
고려 말 극성스런 왜구들의 잦은 노략과 침탈을 피해 영산포로 이주해 온 흑산도 주민들이 그리운 고향 땅에 있었던 섬 ‘영산도’를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 ‘영산마을’이었다는 설과 영산강, 영산포 모두 나주 땅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흑산도의 주변섬인 영산도와는 무관하다는 두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나주목편>에 소개된 군과 현들에 대한 설명에서 나주목에 금성산과 남포진, 흑산도(영산현)가 있다는 기록을 증거로 오히려 영산포가 현재 흑산도 부근에 있는 영산도 지명의 모태라는 설이다.>
영산포는 1876년 개항 이후 이주해 들어오는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의 전기를 맞이했다. 목포와 나주, 광주를 잇는 최고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일제에 의해 영산포 일대는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관공서와 금융·행정기관이 세워졌고, 목이 좋은 수탈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14년경은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개폐식 목교가 세워졌으며, 선창에서 산 고등어 2마리 혹은 2전의 통행료로 다리를 건너는 시기였다. 1989년에는 영산포 대홍수 이후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한 장벽이 세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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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나주평야에서 수탈해온 쌀 도정을 위한 정미소들을 곳곳에 세웠고, 당시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이 산재한 원정통(元町通) 거리로 인한 풍광이 그럴싸해 90년대 전국을 강타한 영화 ‘장군의 아들’과 ‘죽도록 사랑해’가 촬영되기도 했다.
선창가에는 등록문화재 제129호(2004.12.31 지정)인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가 영산강을 굽어보고 있다. 1915년 설치된 등대는 수위 측정과 내륙 등대의 기능을 겸하며 바쁜 뱃사람들의 삶을 비추었던 것이다.
바다도 아닌 곳에 등대가 세워진 배경. 그 이유만으로도 영산포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런 등대 100여 미터 뒤편으로는 동양척식회사 문서고가 세워져 당시 나주평야 일대에서 수탈한 쌀과 농산물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국내 유일의 강변 등대. 1915년 설치 이래 100년의 시간 속을 비추며 영욕의 역사를 지나왔다.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으로 목포에 건설된 영산강 하구언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제 다시 그 쌓인 100년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영산포의 부활을 보기위해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영산포 선창 복원을 위한 ‘근대거리 조성계획’ 등 ‘영산포등대’와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그리고 영산포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끝없는 탐욕 끝에 4년만에 대부호가 되어 만든 구로즈미 가옥이 황포돛배, 홍어 등과 함께 영산포에서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다.
영산포의 상징처럼 수려한 가을 담아내는 ‘영산나루’
팬션과 찻집으로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영산나루’는 영산포의 상징처럼 수려한 가을을 담아내고 있다. 250년 된 나무의 충만한 깃 아래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 청아한 하늘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가을볕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직도 한참인 보랏빛 맥문동과 붉은 상상화의 도도함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마음껏 선물받는 이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움…. 이 따스한 모성애를 느끼는 따사로운 가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것이지만 일제의 잔인무도함과 잔학함이 곳곳에 배인 역사적 생채기를 떠올리자니 극도의 피로감마저 엄습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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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 나해철, 오유권 쟁쟁한 문학가들과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邑內)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榮山浦)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영산포(榮山浦)1>
구구절절 뼈가 저리도록 사무치는 시어들이다. 그 누님의 울음과 가난 말이다. 80년대 까지도 여성의 대학 진학은 요원했다. 중학교를 나와도 옆에 있었던 영산포여상을 진학하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교육보다는 공장으로 농촌보다는 도시로 가족의 생계와 가난을 면하기 위해 영산포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가난한 동네였다.
그 처절한 가난과 싸우며 오로지 한 곳을 바라보았던 또 한명의 영산포 사람. 오유권 문학의 산실 영산포, 그 까닭없이 오랜 시간을 서있어야 했던 영산포 등대에서 그가 잠시 몸담았던 영산포 우체국까지 한번 더 걸음을 재촉한다. 우체국 뜰 안에서 작가로서 길을 선택하고 직장을 사직하고 떠났던 선생을 바라보았던 유년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부친과는 인생의 동반자였다는 그는 바른말하기로도 유명했다 들었다.
이제 다시금 문학과 관광도시로 새롭게 꿈틀거리는 영산포를 마음에 담고 250년 된 오래된 나무 옆에 소담하게 자리잡은 영산나루 펜션에서 1박을 청하기 위해 방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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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둔덕에 서서 다리건너 영강동 창랑정과 금성산 자락의 초가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보면 이곳은 문학의 도시다.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조선 선조때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명문장가였으며, 이조정랑, 북평사, 예조정랑을 지낸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의 기념관이 있다. 백호의 문학관을 마주하고 있는 앙암바위.. 아무리 봐도 목마름을 달래는 한필의 말이 서있는 듯 한 느낌이다. 나이 사십도 되지 않아 임종한 백호의 슬픈 임종이 느껴진다. 영산포, 왕곡, 다시, 공산. 이곳의 목마름은 해결되었는가? 그가 남긴 유언은 “곡‘(哭)하지 말라”였다.
어쩌면 경남 통영의 동피랑에 견줄 수 있는 특별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와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곳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픈 질곡의 역사와 가난의 오랜 설움을 씻어 내며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경을 보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죽전골목을 지나 골모실에 이르는 비교적 기다란 골목길이 결코 머지 않을 것이다.
그 골목 끝자락에 민노당 국회의원을 지낸 고 곽정숙 국회의원의 생가도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있다. 어쩌면 영산포가 더 이상 쇄락한 포구의 작은 도시가 아닌 역사와 문학, 음식과 힐링을 소재로 하는 관광도시로의 발전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경국대전’, 영산포구에 선박 53척 일시에 정박
곳곳에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은 그리움과 추억의 장소가 아닌 아픔과 질곡의 잔재일 뿐이다. 1981년 말 목포 하구둑에 막혀 뱃길을 닫았고, 이제는 온전하게 흐르지 못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세곡 보관을 위한 ‘영산창’이 있었고, 백미를 실어 날리던 번창한 포구에는 ‘경국대전’의 내용을 빌리자면 선박 53척이 일시에 도열했다는 내용으로 영산포구의 위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문헌과 현장을 비교하며 걸을수록 새롭고 특별해진다.
‘풍류락도 영산가람길’로 나주만의 독특한 걷기 체험길 1-7길이 지금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노동하듯이 작품을 썼다”는 영산포 골모실 태생의 작가 오유권 선생의 치열하고 수려한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영산포를 소개하자니 저절로 힘이 난다.
‘백지에 작품을 써서 공책에 옮긴 다음에 원고지에 옮겨 썼다’는 오유권 선생의 문학세계는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고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품인 ‘소문’ 등 장편소설 8편과 중·단편 200여 편 총 213편의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영산포의 청명하기 만한 하늘을 별이 되어 수놓고 있다.
아직도 독자들에게 오유권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만무방>이라는 영화를 검색해보면 된다. 1960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소설 <이역의 산장>을 영화화한 것으로 6·25전쟁 말미에 접전 지역에 있는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그린 영화로 변장호 감독, 윤정희, 장동휘, 김형일 등이 주연한 영화다. 어디 그의 작품이 그 한편이던가. 200편이 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그의 고향 영산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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