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기사글

다산의 하늘과 먼 바다..여전히 절망만 있는 걸까?

투데이뉴스코리아 2005. 10. 13. 15:37

 

다산의 강진만과 영랑을 마주하며... 2
 
강경구

 다시 강진만에 서다.

늘 서보는 곳이지만 늘 남달랐던 강진만... 쪽빛 바다위로 가을이 사뿐히 앉으려 하고 있다. 뽀얀 바다빛 그리고 그 위를 휘감는 갈매기들의 비상앞에 천관산도 만덕산도 여유로울 뿐이다.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던 정약용은 이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808년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여기서 그는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고 하니 그의 유배는 은둔과 칩거를 위한 것보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변혁과 변화를 얻어낼 수 있는 분주함과 가열참이었으며 자기초극 그 자체였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의 다산 사랑이 빚어놓은 다산초당은 원래가 협소하고 초라하기 그지 없었던 오막살이였음을 아는 이라면... 그리하여 그가 얼마나 고적하고 고단했었음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실패한 개혁 되풀이 되는건가?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의문의 죽음과 11살의 순조의 즉위, 그리고 이어지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필두로 정조의 개혁정책은 종지부를 찍었다. 노론벽파의 득세로 천주교를 이유로 1801년 남인세력은 청천병력의 신유박해를 맞게 된다. 정약용의 집안은 초토화되고 셋째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천주교와의 관계로 참수 당한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천주교에 대한 배교의 증거가 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배를 가게 됐고 주막에서 보냈다던 마지막 밤은 어찌 했을까?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이라 했거늘...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만나지 못할 각각의 유배 길을 가게 된다.

▲멀리 강진만... 도처에 가을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직은 초록이 묻어나지만 세상은 새옷을 입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 강경구


 확- 펼쳐진 강진만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것은 다산을 등지고 날마다 마주하였을 정약용의 형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의 미래에 대한 뼈아픔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목민심서 율기편(律己) 에서는 위엄과 신의로써 관속을 통솔하며 청렴과 공정이라는 이도(吏道)정신에 입각하여 정사에 임할 것을 제시하고 있으니 목민관은 행정에 임하기 앞서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이전(吏典) 에서도 관속을 통솔하는 근본은 무엇보다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음을 거듭 천명하고 있으니 목민관의 올바른 정신 자세야말로 밝은 행정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전들의 유혹에 빠져 한 번 부정을 저지르게 되면 수령 노릇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예로 들어서 목민관들의 마음을 정돈케 하였다.  한번의 실수는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숱한 과오와 오욕이 교차하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라보면서 새삼 무슨 이유로 무슨 바람으로 무슨 오기로 이 곳에 난 다시 서고 있는 것인가? 어디 정치뿐이랴? 경제도 교육도 넘어야 할 산이고 큰 파도의 시련일 뿐이다.   국정감사가 11일을 기점으로 마감되고 숱한 화재와 정치스타가 세상에 그 얼굴을 알리고 있지만 참다운 정치가 자리매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 연구하고 몸부림쳐야 하는건지... 좌파와 우파라는 끝없는 논쟁의 종막은 언제이며 이 땅의 진정한 하나는 언제부터일까?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지만 그 서용보가 정약용 선생의 인생의 시련이고 광야였음은 이 또한 삶의 아이러니이지 않겠는가?


다산(茶山)은 가도 과거는 영원히 남는 것...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내려가는 백련사 텃밭에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나무가 서있다.     © 강경구

다산은 떠나온 가족을 그리워 했지만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았다. 다만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가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속속 드러나는 과거의 비리와 의혹들이 연일 언론에 회자되지만 지금껏 그랬듯이 시간을 재고 빨이 지나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영원히 남을 과거를 지울려고 해도 여전히 하늘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기에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열 살 연하의 스님을 만나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다산에게 조선의 버팀목이었던 억불숭유의 철칙도 한낱 종이에 불가했을 것이다. 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도처에 다산을 상징이나 하듯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만덕사(萬德寺 :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고 되돌아 서며 바라보던 그 하늘과 그 바다가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때론 눈물로 때론 기대와 희망으로 바라보았을 그때의 하늘과 바다이련만 과연 그날 이후 희망은 우리에게 있었던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도서 1장 5절....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 / 전남노회 장로 / 의학박사수료(병리), 대체의학석사, 경영학, 철학 전공 / 조선대학교초빙교수 / 광주여대,서영대,송원대,고구려대학 강사 / 보성복내전인치유센터 보완대체의학 상담 / 빛고을,효령노인타운, 송정권노인복지관 노인치유전문강사 / 취재분야 - 선교사,봉사,보완대체의학,암치유 등
 
기사입력: 2005/10/13 [10:27]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