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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신사참배의 결과인가? 역사가 맞이해야 할 당연한 흐름이었는가? | ||||||||||||||||||||||
사랑의 원자탄 산돌 손양원 목사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땅에서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손양원의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1813∼1873)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능라도(綾羅島) 교회의 전도사로, 신학교에서는 뜨거운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로도 유명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그런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1939년 7월 15일 산돌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나병환자들의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1943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체포된 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의 위협에 "당신은 전향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앙이 문제"라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결국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만에 출옥하자 산돌은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나환자 목회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인생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 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산돌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28일 새벽에 총살당했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고 하니 죽는 순간의 영상이 머리를 스치운다. 유화례 선교사 죽음의 100일 피난체험과 동광원과의 평생지기의 연을 맺다. 1950년 7월 23일 아침 양림동은 전쟁의 여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양림교회 예배당으로 으로 달려온 조용택 전도사와 동광원 이현필 선생은 “양치는 목자가 양을 버려 둘 수 없다”고 버티는 유화례 선교사를 설득하고 피난을 종용하기에 이른다. 푹푹 찌는 삼복의 더위를 무릎쓰고 동광원에서 나온 두 명의 청년은 두꺼운 이불로 겹겹이 싼 유화례 선교사를 들처메고 양림동을 나섰다. 동광원과 유화례 선교사의 평생지기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피난지인 전남 화순까지 하루종일 지게에 의지하여 그것도 홑이불과 두꺼운 담요로 덥힌체 도암 마을까지 이동하였고 산의 모습이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613m 높이의 화학산 토굴과 농가를 오가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인민군은 퇴각하였고 유화례 선교사는 1950년 10월 6일 밤, 3개월여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광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보리밥과 쑥죽으로 연명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숨막히는 더위와 배고픔을 참고 돌아왔지만 조용택 선교사는 이미 순교한 뒤였고, 양림교회의 당회장이었던 박석현 목사도 가족과 함께 영암군 학산면에서 순교한 뒤였다. 놀라운 것은 광주가 수복되고 난 후 그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인민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의 위태로운 목숨을 『원수를 원수로 갚지말라』며 이들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숨겨주었던 동광원과 이현필 선생의 신앙에 대한 순수성과 신실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던 화학산에서의 삶을 통하여 동광원과 이현필 선생에 대한 기성교단과의 이단 시비를 해소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그녀를 위해 동광원 식구들은 무려 8명이나 순교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지만 유화례 선교사는 평생 동광원과 귀일원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그들을 조력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분단의 끝이 통일이듯, 분열과 분리의 끝은 하나됨이다. 가슴 아픈 전쟁은 휴전으로 결말이 나고 찾아온 전후의 아픈 상처는 많은 눈물과 고난의 부르짖음을 한반도에 남겨놓았다. 3년간... 동족간 전쟁이라는 슬픈 역사를 가슴에 담고 우리는 또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북한의 두꺼운 장벽을 향해 기도를 퍼붓고 있다. 3대 세습이라는 기이한 정권의 탄생을 예고하며 잘사는 중국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는 김정일의 애타는 정권유지의 깊은 고뇌를 들여다보지만 중국을 살리는 힘은 지하교회의 1억명의 기도와 간구일 수 있다는 것을 김정일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가문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베이스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북한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계급과 공포를 벗겨낼 가공할만한 능력을 지닌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할 텐데...
한국 교회는 6.25 전쟁이후 아픈 상처를 보듬고 영성운동과 치유사역을 병행했어야 함에도 또다시 나라가 분단된 것처럼 교단의 분리라는 극단의 선택을 돌파구로 마련했었다. 1953년 광주는 예장과 기장의 분리로 양림교회가 둘로 나누어졌고, 기존의 양림 교회당은 기장측이 소유하고 예장측은 오원 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오원 기념각 옆에 붉은 벽돌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쟁으로 분리되었고 본 예배당은 통합측에서 소유하게 되었으며, 합동측은 다시 오원 기념각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역시 그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교회당을 신축하고는 양림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리고 1979년 합동측과 개혁측의 분쟁으로 분리라는 극단을 선택했다. 4차 분열로 불리워지는 이 때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 합동에서 정규오 목사가 중심이 되어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 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장로교 분열은 가속화 됐다.
1940년, 1953년, 1959년, 1979년,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교단은 분열과 분리로 통한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신앙의 바닥을 들어내던 우리에게 역사는 쓰디 쓴 아픔의 질곡을 남겼다. 오웬, 일명 오목사로 불리우던 오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그 기념예배당에서 분열의 아픔을 달래며 기도했을 사람들의 처절했을 마음들이 느껴짐은 왜일까? 분열, 분리... 그리나 다시금 일어서야했던 사람들... 분단의 끝이 통일이듯, 분열과 분리의 끝은 하나 됨이다. 분열에 불어 닥치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해야함은 물론이거니와 신사참배나 궁성요배와 같은 역사적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단과 교단의 책임자들은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 같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요,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같다. 36년간의 식민생활과, 3년간의 전쟁과 분단국가, 정치적 독제와 4.19, 5.16 이후 군부독제와 서슬푸른 군인대통령 시절을 거슬러 장로 대통령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우리 교회는 과연 제대로 흘러가고는 있는 것인가... 분리와 통합이라는 끊임없는 모순을 극복하고 상생과 화합의 발판을 마련할 뚜렷한 구심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교단이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의 합치가 진정 어렵다면 몇 개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들을 설정하고 매년 특별기도회와 공동회개기도회를 개체하여 그 날만은 같은 자리에 모여 다시금 이 땅이 신사참배와 같은 극단의 선택 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회개하는 운동이 필요할 때이다. 자라나는 복음 2, 3세대들을 위한 교단 지도자들의 노력이 절실할 때이다.
파란만장한 한국에서의 삶을 살았던 유화례 선교사(florence e. root), 후로렌스 룻은 1957년 수피아여중고 교장직을 은퇴하고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고국으로 돌아가 양로원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한국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는 그녀는 10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유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한 안영로(광주서남교회 원로목사), 안종철, 노태연, 김남길 목사와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은 광주 수피아여고 전 동창회장 조아라씨 등은『유화례 선교사는 일제 때는 신사참배 반대로 고통을 겪었고 6.25 동란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어려움을 당했다』면서 『유 선교사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딸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녀가 개척한 교회만도 20여개에 이른다. 특히 빌려준 6천환이 호남최대의 성전으로 알려진 성광교회를 짓는데 초석이 됐던 양재열 장로와 김행이 권사와의 훈훈한 이야기도 이미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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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26 [02:04] 최종편집: ⓒ newspow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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