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사글

호남 선교에 목숨 바친 유화례 선교사 2

투데이뉴스코리아 2010. 9. 26. 15:19

 

박석현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아파하다
 
광주=강경구
기독교안의 지울 수 없는 아픔의 흔적 신사참배

 
장로회 총회장 김응순은 “기독교 일본화”에 힘쓰는 일환으로 총회 서기 김종대 목사와 함께 이중교에서 궁성 요배(23일), 메이지신궁 참배, 야스쿠니신사 참배(26일), 이세신궁 참배(29일)를 하고 돌아왔다는「기독교신문」1943년 3월 3일자와 “장로회 총회대표, 靖國神社 참배”를 보면서 느껴지는 기독교 역사의 참담한 자화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앞서 1941년「장로회보」10월 1일자,『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에는 노회연맹 대표 72명이 참가하여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대”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전필순ㆍ조승제ㆍ곽진근ㆍ박석현 목사가 이끄는 4대로 나누어 신궁 터를 닦는 작업을 하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있음을 알 수 있다.


▲ 많은 목회자들이 일본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고, 또 어떤 목회자들은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우상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기도 했다.    

무엇이 박석현 목사의 뜨거운 신앙의 불꽃을 흔들리게 했을까? 목회 강단권과 교회 재산권, 노회 제명과 사택 몰수 등의 강압과 각종 회유와 협박이 난무했고 ‘신체제’에 적응한다고 하여 교회의 종을 떼어 바쳤는데 1942년 10월 15일까지 1,540개를 바쳤다고 나온다. 교회의 통폐합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자행된 교회안의 질서 파괴와 하나님에 대한 배교의 흔적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있음을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는 없다. 참고로 1942년 장로교회 총수는 2,543개, 249,666명으로 나와 있다.
1945년 8월 15일은 민족의 해방이요, 교회의 해방이었다. 해방과 함께 박석현 목사는 시국대책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에는 건평 50평의 새 교회를 건축하는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며 선교활동을 펼친다. 1949년 18년간의 목회생활에서 은퇴하고 광주 양림동으로 이주하였지만 소식을 들은 양림교회 교인들이 김창국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줄 것을 간곡히 청하여 양림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중견목회자로 안정된 목양을 했지만 1년도 못되어 비극적인 6.25가 터졌다. 

 
▲ 1949년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하여 즐거운 성탄절과 다가올 1950년의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를 모으며 함게했다. 중앙이 박석현 목사이다.     ©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을 때 장모가 될 나옥매 전도사를 만나 딸인 김귀남 사모를 아내로 맞았는데 그의 장모가 된 나옥매 전도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4년 5개월간을 옥살이 하였던 장본인으로 전남노회에서도 유명한 신앙인이었다. 

  
신사참배는 박석현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그의 마음속을 휘몰아오던 신사참배라는 굴욕의 순간들이 수도 없이 교차 했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당의 무자비한 박해와 핍박을 감내하였지만 신앙의 결단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마음 한 켠에 진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와 굴욕적인 양심이 회복될 수 있는 전기가 자신의 순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31년간을 속국으로 산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어떤 거부 할 수 없는 흐름이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중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인 공산당의 만행 앞에서 신앙은 선택이 아닌 절대적인 무언가를 그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입구 멀리 천해교회가 보인다. 조금만 가면 상월교회가 있다. 박석현 목사와 일가족이 순교한 현장이다.     ©뉴스파워 강경구

박 목사와 일행 5명이 연행되가는 중 어린 아들 박원택을 살려주려는 인민군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가야한다고 거절하여 결국 박 목사, 김귀남 사모, 나옥매 전도사, 아들 박원택, 신덕철 전도사 5인이 모두 순교하였다.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 박석현 목사는 “식모는 내 식구가 아니니 놓아주시오."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였고 공산당들은 그 식모를 석방해주었고 한다. 그 때문에 박석현 목사와 가족들의 숭고하면서도 가슴 아픈 순교가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죽음 앞에 서서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시금 신사참배의 부당함과 굴절된 교회 역사의 회복을 부르짖는 교회 안의 외침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간 우리는 두루뭉실하게 흘러가고 있는 배교의 역사를 외면하고 100배 성장이라는 과속 드라이브에 영성을 맡긴 체 우리의 속옷을 세탁할 마음마저 놓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 힌경직 목사의 추모 기념관에 있는 한경직 목사의 평생의 기도제목    
면 숱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죽음위에 이미 교권과 영성 회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일이지만, 예장 통합과 합동, 기장, 합신 등 4개 교단이 가졌던 2008년 한국교회 제주 선언문에서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 결의로 실시된 신사참배에 대한 70년만의 회개가 통한과 자복함으로 드려졌고, 이미 1992년 6월엔 고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가 템플턴상 수상 축하예배에서 “반세기 전에 지은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 한다” 고 머리를 숙인 것을 필두로 2006년 1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같은 해 9월 총회 때 신사참배 행위를 사과한 적이 있다. 
 
유화례 선교사, 박석현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아파하다.

유선교사는 1950년 10월 6일 밤에야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7월 23일 순교한 박석현 목사의 소식을 듣고는 그의 위대한 신앙의 결단에 크게 감동이 되어 그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더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박석현 목사가 순교한 7월 23일이면 그녀가 공산당의 추적을 피해 홑이불로 묶인 몸뚱이 위에 두꺼운 헌 담요까지 덮고는 한참 기승을 부리던 더위를 무릎쓰고 몸과 옷까지도 땀에 절인 체 땀범벅이가 되어 5시간을 지게에 얹혀 피난을 가던 날 밤이었음을... 푹푹 찌는 담요 속에 숨어서 하루종일 지게를 의지하여 보내면서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음은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던 사건역시 1950년 9월 28일에 일어났다. 믿음의 동역자요 신앙의 친구였던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건이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8일 일어 난 것이다. "내 주소는 주님의 품 속이며, 생일은 중생된 날입니다. 생일의 기쁜 잔치는 천당에 들어가는 그 날 뿐입니다."라고 말했던 산돌 손양원 목사의 음성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을 것이다. 믿음의 동역자 손양원 목사마저 6.25 전란중 인민군의 총탄에 여수시 둔덕동 한 저수지에서 처절하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 손양원 목사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신앙에 대한 숭고함과 숙연함을 주는 롤 모델일 수 밖에 없다.  언행일치의 목회자로, 손 불 목사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처절하게 고문을 받는 장면이다.    
 
도대체 왜! 이 민족 안에 불어 닥치는 고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악과 극단의 모습이었을까? 과연 신사참배의 결과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굴레였을까? 정치적 대립과 오랜 유교사회의 종속적 관계로부터의 자연스런 해방이 아닌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주의 개념의 팽배로 인해 발생한 사상적 대립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사참배의 오욕... 벗겨도 벗겨도 드러나지지 않는 이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여전히 회개를 요구하며 신사참배 회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한 단체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 국민성에 대한 자정과 잊기에는 너무도 크고 과중한 책임이 따랐던 역사의 교훈과 아픔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는 깊은 속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 1950년 격동의 한 해가 시작됐다. 1월 15일 양림교회를 배경으로 교우들과 함께한 박석현 목사...     © 양림교회

▲ 양림동 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일명 오기원 목사 등의 생활관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상사화가 무리를 지어 피었다가 지고있다...     © 뉴스파워 강경구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조선대학교 대체의학과 초빙교수/광주여자대학교/송원대학교/서영대학/고구려대학/빛고을노인건강타운/효령노인건강타운 강사
 
기사입력: 2010/09/26 [01:34]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