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례 선교사(florence e. root) 평생 한국을 위해 기도 파란만장한 한국에서의 삶을 살았던 유화례 선교사(florence e. root), 후로렌스 룻은 1957년 수피아여중고 교장직을 은퇴하고,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고국으로 돌아가 양로원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한국을 위한 기도를 드렸고, 10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유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한 안영로(광주서남교회 원로목사), 안종열, 노태연, 김남길 목사와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은 광주 수피아여고 전 동창회장 조아라씨 등은『유화례 선교사는 일제 때는 신사참배 반대로 고통을 겪었고, 6.25 동란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어려움을 당했다』면서,『유 선교사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녀가 개척한 교회만도 20여개에 이른다. 특히, 유화례 선교사가 빌려준 6천환이 호남최대의 성전으로 알려진 정읍성광교회를 짓는데 초석이 됐던 양재열 장로와 김행이 권사와의 훈훈한 이야기도 이미 알려져 있다. 양재열 장로는 1959년 2월 23일 정읍 성광교회가 매입한 정주읍 연지리 50-6에 600평의 대지에 160평 석조 2층 예배당 신축기공에 아낌없이 특별헌금을 기탁했었다. 기독신문 2대 이사장이며, 기독실업인회 창립 멤버였던 고 양재열 장로는 정읍성광교회에서 1956년 장로 장립을 받았으며, 총회 회계,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멤버, 아세아연합신학원 설립멤버로 활동했었다. 바로 양창삼 교수와 양국주 선교사의 부친이다.
정읍 성광교회는 호남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다.
▲ 호남최대의 성전으로 알려진 정읍성광교회를 짓는데 초석이 됐던 양재열 장로와 김행이 권사와의 훈훈한 이야기도 이미 알려져 있다. © 강경구 |
| 호남고속도로 정읍 분기점에 이르면 한 눈에 들어오는 교회가 바로 정읍성광교회다. 부인 김행이 사모는 17살이던 1938년, 유 선교사를 만나 그녀의 배려로 이일성경학교에서 수학했다. 독립투사였던 아버지의 신분으로 공부가 어려웠던 그녀를 이준묵, 강순명 목사, 유화례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일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결국 유 선교사의 양딸이 되어 그녀의 임종을 지키기까지 했다. 1938년 어쩌면 평생을 평범했을 한 사람의 인생이 유화례라는 이국의 선교사를 통해 바뀌게 된다. 유화례 선교사가 생을 마감한 1995년까지 장장 58년간의 긴 인연이었다. 발악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후 극도의 빈곤과 가난을 일상으로 여겼던 김행이 권사의 처지를 측은히 여긴 유 선교사가 당시로는 거금이었을 6천환을 빌려준 것이었고, 양재열 장로와 김행이 권사 내외는 유 선교사로부터 받았던 감동적인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당시 집과 전 재산을 성광교회의 성전 건축을 위해 헌납했던 것이다. 2011년 ‘뇌신경마비다발성증후군’으로 입원치료후에도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이끌며 호남지역 선교사들의 일대기를 재조명하고 있는 양국주 선교사의 그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요,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같다. 36년간의 식민생활과, 3년간의 6.25 전쟁과 분단 60년... 4.19, 5.16 이후 기나긴 독제와 군사정권, 서슬푸른 군인대통령 시절을 거슬러 장로 대통령 시대를 살고 이제 기독교는 대중에 가장 인기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 천이백만이라는 기독교 인구가 무색할 정도다. 교회마다 넘치던 아이들은 공부와 성적에 밀려 학교로 학원으로 자리를 옮긴지 오래다. 우리 교회는 과연 제대로 흘러가고는 있는 것인가... 끊임없는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창의적인 소통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는 이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다시금 이 땅이 신사참배와 같은 극단의 선택 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바뀌지 않고 있으며, 한반도 주변국가의 상황도 언제든 일촉즉발의 상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도 유화례 그녀의 기도 제목에는 항상 ‘한국과 광주 땅의 사람들’이 빠지지 않았다. 노환으로 은퇴관 침대에서 떨어져 늑골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는 어려운 순간에도 여전히 한국과 광주는 그녀의 마음과 삶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광주땅에 정착하여 수피아여고 음악교사로 재직순간 천국의 길로 떠난 유진벨 선교사와 12살 연상이었던 선배 쉐핑의 헌신적인 사랑,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와 순교자 박석현 목사, 동광원 사람들과 맨발의 성자 이현필, 젊은 조용택 전도사와 혹시나 하고 수복되지 않았던 영광지방으로 달려갔을때 수복후 국군과 경찰관에 의해 시행 직전이었던 학살의 현장에서 구했던 많은 좌익계 젊은이들, 광주경찰서에도 부역죄로 잡혀와있던 많은 청년들을 위해 감형 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흘러갔을 것이고 그때마다 그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이다.
안영로 목사가 기억하고 있는 유화례 선교사 유화례 선교사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빛이 되었다. 양아들이었던 서남교회 원로인 안영로 목사는 생전 유화례 선교사가 살고 있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양로원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형 안종열 목사와 방문할 때마다 정성을 담아 용돈을 드렸지만 1995년 5월 26일 유화례 선교사가 소천이후 그 용돈마저도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 가득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2013년 4월, 안영로 목사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빛,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을 전해 준 유화례 선교사가 1975년도에 전남매일신문에 기고했던 ‘수피아와 나’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한국선교와 전라도 선교의 어머니 유화례”라는 책으로 엮기도 했다. 6.25 전쟁 때 화순 화학산 피난시절, 교육과 전도를 위해 교도소와 고아원을 오가며 헌신했던 순간들을 글로 엮었고, 일제의 잔인한 탄압과 신사참배의 원천적인 거부라는 용기, 국어 말살에 대한 저항, 피난당시의 생생한 체험과 공산당이 학교에 침투했던 내용과 수피아와 이별후 70세에 정년퇴직하여 고국인 미국땅으로 돌아가기 까지의 비교적 소상한 내용을 수록하여 은혜와 감동을 더해 주고 있다. 안영로 목사는 이미 1994년 '메마른 땅에 단비가 되어'라는 제목의 책으로 유화례 선교사의 사역들과 함께 그녀와의 추억들을 듬뿍 담아낸 책을 일반에 발표했으며, 1997년엔 영문으로도 변역되어 미국 총회에 1천권을 배포하기도 했다. 미국 총회에서는 선교사가 아닌 신분으로 미국 선교사에 대해 저술한 최초의 저술로 인정받아 미국 Louisiana Baptist University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됐다.
어디서부터 우리들의 순수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순애보같은 사랑이 더 이상 있을것 같지 않는 척박한 시대, 한국 기독교의 태동이 가슴 저리도록 슬픈 아픔과 고통의 단면을 가지고 있었고, 손을 대면 배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굴곡과 굴절이 역사의 도처에서 한반도를 지독하게도 어지럽혀왔다. 2014년 해방이후 고작 70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70년간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한반도는 생각하기도 싫은 전쟁과 ‘뭐’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과 절대절명의 이데올로기의 휘뿌연 분진에 아직도 휩싸여 있다. 이 구조적인 모순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는 가장 큰 적일수 있다. 예수의 심장으로, 후로렌스 롯(florence e. root)이 그토록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너무도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저기서 그녀의 그 소중한 사랑이 들불처럼 일어나주기를 바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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