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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송 1대 엘머 보이어 선교사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2. 1. 12:31







한국 파송 1대 엘머 보이어 선교사
선교사 보이열가문의 한국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일대기
 
강경구
▲ 여수 애양원 근무시절 직원들과 함께한 맨우측 보이열 선교사     © 강경구
한국에 파송된 보이어 가문의 1대 선교사는 엘머 보이어(Elmer T. Boyer,한국명 '보이열', 1893-1976) 선교사로 1921년에 내한했었다. 선교사 보이열의 한국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일대기는 1976년까지로 한국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45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정국은 전쟁과 일제의 포학한 한민족 말살정책이 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가공할만한 사건이 일본열도를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원폭이 투하된 것이다. 폐허로 변해버린 히로시마에 이어 9일엔 나가사키에도 한 개가 투하됐다.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으로 불리는 2개의 원자폭탄이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무게 4082kg, 길이 3m, 지름 0.72m, 위력이 TNT 1만5천t급 이었다. 한 순간에 20여만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이라는 처참한 결론을 선택했다. 제국주의의 멸망이었지만 불행은 한반도가 더 컸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한반도의 자유는 그렇게 유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공할만한 원자폭탄 폭격은 히로시마 인구 약 33만 명 중 14만 명과 나가사키 인구 약 27만 명 중 7만 명을 죽게했다. 참혹한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더 큰 벌을 받아야 했지만 70년이 지나자 다시 제국주의의 본성을 들어내고 있다. 독도 야욕과 야스쿠니 참배, 전쟁을 대비하는 헌법 개정 등 군국의 이빨을 들어내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일까? 바로 일본 자신들만을 위한 이토오히로부미식 야욕이 아베정권에 와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 한국 오지에 내 삶을 불태우며     © 강경구
1948년 10월 22일 순천시가지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렸다. 한때 여순반란사건으로 알려진 여수·순천 사건이 원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에 터진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당시 순천군민들은 반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학살과 갖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진압군에 의해 발생한 비무장 민간인 집단학살지는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조곡동 둑실마을, 구랑실과 반송쟁이, 매곡동에 이르기까지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에 대한 보복성이 짙었지만 죄없는 민간인들의 죽음이 시신수습을 지휘한 엘머 보이어 선교사(Elmer T. Boyer/한국명-보이열)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보이열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삶은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맞물려 있다. 1950년 6.25 전쟁 현장에 한국민들과 함께하면서 그는 부산에서 순천으로 이동중 길가에 널린 시체들을 목도하면서 가슴을 치며 아파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1950년 12월 24일 전쟁의 와중에 당시 17세인 김도빈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김도빈은 누구인가? 조선대 법대(1960년), 총신(64년/58회)로 정읍성광교회 당회장이 된 인물이다. 

보이열 선교사의 아들 케네스 보이어(Kenneth E. Boyer,보계선)
▲ 순천지역의 선교 100주년의 기념비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 강경구


보이열 선교사의 아들 케네스 보이어는 한국명이 보계선이다. 아내 실비아 선교사와는 각각의 선교사로 한국에 왔지만 부부가 되어 한국을 섬겼다. 보계선 선교사는 1930년 전주예수병원에서 출생했다. 2차대전 발발 직전 귀국하여 1957년 다시 한국 선교사로 왔다. 간호학을 공부하던중 1959년 한국에 온 실비아 선교사와 1961년 광주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으며 섬을 다니며 병원을 열었다. 하루에 200여명 안팎을 돌보면서 가장 먼저 기생충 퇴치운동과 소아마비 예방접종 등의 사역을 복음사역과 함께했다. 특히 제주지역을 담당했던 보계선 선교사 부부는 제주도에서 1978년까지 18년 동안을 헌신하다가 1980년 27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주지역 선교를 위해 광주에 거주하면서 제주를 비행기로 왕래했고, 일주일에 이틀,많게는 5일동안 체류하면서 의료선교와 평신도 훈련 사역을 병행했다. 1972년 9월 1일에는 홍은섭 장로의 명의로 비영리 의료기관인 제주기독의원 설립을 제주도 지사로부터 허가받았다. 그리고는 광주기독병원 소장 카링톤 의사가 매주 주말 이틀씩 제주도에서 진료를 도왔고, 제주노회와 협력해 교회를 개척했으며, 평신도 센터를 지어 학생들을 집중 훈련시켰다. 그러던중 전주예수병원의 도움으로 제주병원이 전주예수병원의 분원으로 편입되어 상주 의사 2명이 파견되는 기쁨을 제주도에 선물해주었다. 당시 제주도의 특성상 안질환자들과 이빈후과 질환자들이 많았기에 안과,이빈후과 의사 2명이 파견된 것이다. 이후,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치의학과를 만든 뉴스마 박사가 일본 오키나와 공군병원에서 쓰던 의료장비의 일부를 제주로 가져와 치과시설을 만들어주는 등 제주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보이어 가문은 한국 초대 선교사로 보이열 선교사(엘머 보이어, Elmer T. Boyer)가 1대,보계선 선교사가 2대, 그리고 19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나 80년도에 미국으로 건너 갔다가 대전외국인학교 초청으로 지난 1992년 한국에 온 보계선 선교사의 아들 디모데 보이어선교사가 3대로 한국을 섬기고 있다. 보계선선교사는 은퇴 후에도 생활비를 모아 호남지역에 매년 5천불씩 지원했다고 한다. 가난한 신학생들을 향한 그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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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3/28 [18:33]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