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기사글

호남선교 시원 '7인의 선발대(2)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1. 30. 19:55






호남선교 시원 '7인의 선발대(2)
김창국 으로 이어지는 헌신과 전주 화산에 딸기 보급
 
강경구
1905년 잉골드와 포사이트 협진으로 6,000명 치료
▲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옵소서!" 잉골드의 고백이었다. 최초 잉골드의 진료장면이다.     © 강경구
그녀는 1897년 미국을 떠나 한반도로 향하기 전 7월 18일 일기에서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옵소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것과, 지나치게 내 자신의 일과 세상의 도움에 의존할까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반도로 몸과 마음을 향했고, 9월 1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1904년 포사이트가 제 2대 원장으로 있던 해부터 시작하여 1925년까지 전주를 섬겼다. 1905년 한 해 동안 잉골드와 포사이트 협진으로 6,000명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7년 7월 17일에는 레이놀드 목사의 설교와 집례로 5명의 신자가 전주에서 역사적인 첫 세례를 받은 해였다. 그들은 김창국, 김내윤, 유씨부인(유충경의 모), 김씨부인(김창국의 모), 함씨부인 이었다. 또한 김창국의 조모와 모친은 테이트 양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당시 인구 5만이었던 전주의 최초 신자들이었다. 1897년 많은 선교사들의 거주는 전주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선교사들은 화산동 지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곳이 서문외교회(西門外敎會)의 시작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개교를 앞두는 가슴 설레이는 부흥의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만남 테이트(Lewis B. Tate)와 잉골드(Dr. Mattie B. Ingold)
▲ 1897년 많은 선교사들의 거주는 전주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선교사들은 화산동 지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 강경구
신앙의 뿌리, 헌신적인 희생의 터전위로 피우는 희망의 불꽃은 여전히 기독교의 저변을 흐르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1903년, 군산에서 활동하던 전킨의 건강이 좋지않자 1904년 5월 예수병원은 포사이드(DR. Wiley H.Forsythe, 보위렴)원장이 맡아야만 했다. 1905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인 9월 잉골드는 테이트(Lewis B. Tate)와 결혼하였으며, 이 때 테이트의 나이 43세였고, 잉골드는 38세였다. 결혼 후 잉골드는 진료소를 사임하고 남편 테이트와 함께 전북 복음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농촌지역을 순회하며 농촌선교에 전력했고, 여성들의 신앙교육과 성경 교육에 전념했다. 이때 한반도는 위기의 정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1905년 러·일전쟁, 1907년 고종 황제 퇴위,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패망의 기로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잉골드는 테이트와 함께 김제 금산교회 등 78개 교회를 세워 전북 복음화에 기여했다. 1905년엔 딸기(Strawberry) 품종인 Dewey를 들여와 전주 화산동 일대를 딸기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1925년 한반도에서의 30여년간의 삶을 정리하고 플로리다에 정착했으며, 남편 테이트는 플로리다에서 심장 마비로 1929년 별세했고, 잉골드는 1962년 10월 26일 별세하여 남편과 함께 안장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결과였다. 실로 엄청난 결과가 한반도 남단에 복음의 꽃을 피우게 했고 민족을 살리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전주 최초의 세례교인 김창국(金昶國) 목사는 누구인가?
▲ 김창국 목사     © 강경구
1884년 1월 28일 전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김제원(金濟元)의 二男이었던 김창국은 조모와 모친이 선교사였던 테이트(Miss Mattie Tate)에게 전도됐다. 테이트 목사, 해리슨 목사, 레이놀즈 목사의 부인이 경영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하였으며, 후일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소학교였던 신흥학교에 다녔다. 김창국은 어려서부터 선교사들을 도왔으며 전도활동에 힘썼다고 기록되고 있다.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의 세례자 명단에 포함됐고, 이때 그의 나이는 14세였다. 1900년 들어 레이놀즈에게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가 신흥학교 시절이다. 해리슨 목사의 부인과 테이트양은 그를 아주 훌륭한 아이(good child)라고 평했다. 그런 그가 1922년 4월 20일 광주제일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것이다. 그는 해리슨 부인의 주선으로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후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여 1915년 졸업하여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되기 전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의 3년 근무, 금산(金山)에 있는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 3년을 근무하며 후학을 가르쳤으며, 1910년부터 전북 익산시에서 4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다. 1915년 목사 임직후 익산시에서 네 곳의 교회를 맡아 2년간 봉직했으며, 1917년에는 제주도로 파송되어 6년 동안 제주를 섬겼다. 당시 제주 내도리 교회(濟州內都里敎會), 삼양리 교회(三陽里敎會) 등을 설립한 후 1922년 광주 남문밖 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楊林敎會)를 창설하여 25년간이나 양림교회를 섬겼다고 기록되고 있다. 김창국 목사는 광주의 초대 YWCA회장을 역임한 부인 양응도 여사와의 사이에 6남매(4남 2녀)를 두었는데 숭전대학교 교수를 지낸 시인 김현승(金顯承)씨가 차남이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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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5/26 [02:05]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