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사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특집 1

투데이뉴스코리아 2010. 9. 9. 14:50

 

10일 귀일원에서 이현필의 생애와 한국적 영성 세미나 열려
 
광주=강경구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의 청빈과 나눔의 성자 호세아 이세종 

▲ 이공님 기도처     © 뉴스파워 강경구
이세종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두 번째 찾아간 화순군 도암면 천태산 자락의 등광교회는 늦더위속의 작은 바람들이 한올 한올 더위를 식혀주고 있는냥 제법 싸늘한 가을이 한창이다. 여기저기 곱게곱게 머금은 가을꽃들의 흔들거리는 모양새가 예쁘다. 천태산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과 수많은 약초들로 유명한 곳이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조금 숨이차다 싶었는데 가느다란 비와 한줄기 바람이 이공의 기도터에 머물다가 울창한 수풀사이로 사그라든다. 소스라치게 놀란 산새가 날개를 퍼득이며 시야를 어지럽게 하지만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고 불리는 이세종의 기도터에는 고요만 머물고 있다.
그가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부인에게 남매 사이로 지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은 이를 거부하고 두 번씩이나 개가하였고, 그때마다 지게로 직접 살림을 져다 주었으며, 부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받아준 것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별명이 구약성경의 호세아다. 서른의 나이로 14살 꽃다운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10년간을 지내며 20대 중반이 된 부인에게 금욕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이세종으로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그런 아내도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감사했고, 그녀는 77세를 일기로 임종할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남편에게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자 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이세종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예정되고 있는 1880년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의 한반도의 사회상은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일본과 구미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이 점입가경이던 시기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 살았던 그는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여서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하였고 억척스레 일하고 구두쇠처럼 재산을 모아 머슴살이 10년 만에 마을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된다.

 
▲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기슭에 있는 이세종 선생의 기도터     ©뉴스파워 강경구
이세종은 한때 화순 도암 등광리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었지만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평생 청빈과 순결, 생명 경외 사상을 천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이후 기상천외한 그의 예수사랑 실천은 세리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성서의 얘기를 읽자마자 이를 바로 실천에 옮겼고, 예수 믿기 전 흉년이 들었던 해에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판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며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예수의 희년 선언에 따라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모두 불 질러 버리고 탕감해 줌으로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였다. 심지어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고 한다.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세종은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간청하였고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였다고 한다.그의 진심을 알고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자 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만을 발했다고 한다. 이공(李公)이 아닌 이공(李空)으로 자기가 없는 자기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다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밤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에게 성서를 가르쳤다. 기성교회와는 달리 삶의 실천을 강조했던 그는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독려했다고한다. 소문이 나자 멀리 광주에서 전도사, 선생, 목사들이 배우기 위해 그의 처소를 방문하였고,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목사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등이 있었다. 유명한 사상가 로는 류영모, ymca 총무를 역임했던 현동완 선생,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김병로판사 등이 그에게서 삶을 배웠다.

▲ 화순군 도암면 천태산 자락의 등광교회에서 가을을 발견한다     ©뉴스파워 강경구
 
그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삼개월을 곡기를 끊어 자기 몸을 비우고, 마지막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주어야 합니다.‘ 라고 부탁했다.
남긴 유산도, 사진 한 장도 없이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남아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계속 이어 개신교 영성의 터전이 되고 있다. 

  
도암의 성자 이세종에서 맨발의 성자 이현필까지


한신대의 실천신학자 박근원 교수는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는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운동이라 말하고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다.” 고 말했다. 감신대의 조직신학자 정경옥 교수는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했다.
이세종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는데, 이는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고,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주지 말라. 내 욕심과는 정반대되게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서로 채워주지 말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일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어쩌다 병이 나면 곡기를 끊었다. 병중에는 죽이나 숭늉이나 미음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니 콩잎사귀 죽 같은 아주 거친 음식이 주였는데 병중에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고 한다. 아파도 매양 약을 거의 쓰지 않았던 그는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하였다고 한다.
9월 10일 귀일원에서 펼쳐지는 호남신학대학 차종순 총장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생애의 재조명을 통해 한국적 영성의 기원을 찾는 좋은 시간이 되줄 것을 기대한다.

 

▲ 9월 10일 광주 남구 봉선동 귀일원에서 호남신학대학 차종순 총장을 모시고 열리는 이현필의 생애와 한국적 영성 세미나를 기대하며     © 뉴스파워 강경구

[기사참고]

조헌정 목사 <하늘뜻펴기> http://www.veritas.kr/contents/article/sub_re.html?no=7218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은성 1993.
조현. <울림: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이세종편)> 2008.
최흥욱.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이세종> 기독교사상

 

▲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까지도 강조했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의 삶은 이현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뉴스파워  강경구

▲ 천태산 오르는 길 나무의 반영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호수와 시원한 잣나무들이 보내주는 바람을 맞으며...     © 뉴스파워 강경구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조선대학교 대체의학과 초빙교수/광주여자대학교/송원대학교/서영대학/고구려대학/빛고을노인건강타운/효령노인건강타운 강사
 
기사입력: 2010/09/09 [10:53]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