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기사글
내초도 아펜젤러 순교기념관을 가다
투데이뉴스코리아
2011. 1. 26. 02:49

내초도 아펜젤러 순교기념관을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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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에 군산 어청도에서 순교한 그가 꿈꿨던 조선의 복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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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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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꿈은 조선의 완전한 복음화였다.
▲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 강경구 |
|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에 태어났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출생한 그에게 당시 조선(朝鮮)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1884년 11월에 엘라 제이 닷지(ella j. dodge)와 결혼한 후 감리교 한국선교부(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번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84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고, 이듬해인 1885년 2월에 일본을 거쳐 4월 5일인 부활주일에 조선의 재물포인 지금의 인천에 상륙했다.
1884년 12월부터 1885년 4월까지 그가 인생이 주는 모든 삶의 가능성을 복음의 가치아래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복음의 깃발로 남은 인생을 드리고자 했을 때의 조선은 12월에 터진 갑신정변으로 인해 복잡한 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펜젤러가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출발한 1884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날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급진파에 의해 발생한 갑신정변은 일본과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당시 정치권의 극과 극이 부딪힌 정변이었다. 청나라와 관계를 끊고, 양반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개혁안은 비정한 일본의 배반과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실패했었다. 이후 양국은 1885년 4월 18일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됐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4월은 영국과 러시아마저도 조선땅의 패권을 놓고 거문도를 점령하는 등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의 치열한 패권 각축장이 되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자유와 빛을 갈망한 아펜젤러의 기도
▲ 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여!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함과 생명의 빛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 강경구 |
|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여!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함과 생명의 빛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끝나갈 줄 모르는 조선의 정치적 불안과 국제정세는 아펜젤러의 입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본으로 가서 70여일간을 머물다가 6월 20일 재입국 할 때까지도 불안은 여전하였다. 일본에서의 75일간 그의 끝없는 고뇌와 뇌리를 스쳤을 혼돈과 암흑의 땅을 향한 아펜젤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조금도 주저함없이 조선에 재입국하여 2달여가 지난 8월부터 복음의 새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배재학당과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과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화학당을 설립하였고, 이후 정동교회를 통해서는 학원선교 및 목회자로서의 목양에 대한 집중사역을 펼쳐갔다.
1888년 1월에는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 설립,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부터는 [교회]지를 확대한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와 협성회보를 발간하는 등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는 경이적인 문서 선교 사역을 주도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에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으며,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는 등 선교와 교육,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함양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내하였다.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리라.
▲ 아펜젤러기념관이 있는 내초도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는 쏟아지는 눈발을 맞아가며 숭고한 아펜젤러의 삶을 본받기 위해 찾는 이들에게 그의 삶과 복음의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 강경구 |
| 아펜젤러가 꿈꿨던 조선의 복음화란 조선의 본질적인 변화였다. 복음 전도의 기치를 걸고 미개한 조선 땅에 폭풍처럼 불어닥친 예수의 바람은 신분차별로 인한 삶의 암흑과 무지로부터의 해방, 강대국의 식민지 논리에 놀아나는 끝없는 빈곤과 계획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 그 무지와 무질서로 인한 미신의 맹종과 부정 부패의 고리를 끊어 내는 일종의 혁명과 같았다. 한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교육을 통한 국민의식의 함양과 문맹의 퇴치는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자립정신을 일깨워주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끝내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마저도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복음의 전달자, 사랑의 전달자, 예수에 미쳐버린 사람,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 임춘희 목사는 군산 내초도 온누리교회를 담임하며 아펜젤러의 기념관을 오픈한이래 방문자들을 위한 안내를 자처하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 강경구 |
|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소서!”
이 기도는 아펜젤러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일본, 부산을 거쳐 인천에 도착한 후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인천앞바다에서 드렸던 한반도를 향한 첫 번째 기도였고, 그 기도는 그가 순교한 1902년 6월 12일로 10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희망과 빛이 되어 한국인들의 마음에 자유와 부흥의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에 태어났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출생한 그에게 당시 조선(朝鮮)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강경구 |
| 서해안에서 불어오는 눈폭풍이 매섭다. 군산시 내초도에서 새만금을 향해서 가다가 다시 군산 ic로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눈 폭풍을 만난 것이다. 어청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아펜젤러의 죽음은 우리 민족이 잊어서는 안될 복음적 가치와 교회가 회복해야할 소명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 수 있다. 아펜젤러기념관이 있는 내초도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는 쏟아지는 눈발을 맞아가며 숭고한 아펜젤러의 삶을 본받기 위해 찾는 이들에게 그의 삶과 복음의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 아펜젤러의 죽음은 우리 민족이 잊어서는 안될 복음적 가치와 교회가 회복해야할 소명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 수 있다. 눈이 쏟아지는 군산에서 순교의 소중한 가치를 묻고 은혜와 감동을 누렸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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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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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1/26 [02:49] 최종편집: ⓒ newspow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