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기사글

'터치 전도' 신경직 목사를 추모하며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2. 6. 12:04






'터치 전도' 신경직 목사를 추모하며
7월 복음의 현장에서 들려온 아쉬운 이별
 
강경구

한국교회를 향한 신경직 목사의 감성터치

▲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인생, 그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주님과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던 그에게서 나는 바울을 보았다.      ©강경구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험하게 퍼붓던 빗속를 뜷고 간암말기 7개월이라는 시한부의 명찰을 휴지조각처럼 속주머니에 집어넣어버린 신경직 목사가 터치전도 특강이라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성큼 성큼 요양센터를 등지고 떠난다. 그의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민족 복음화를 향한 열정과 헌신이라는 낱말이 어울린다.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인생, 그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주님과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던 그에게서 나는 바울을 보았다. 암덩어리가 무서운게 아니라 자신에게 엄습하는 게으름과 한국교회안의 결핍되고 있는 전도사역이 눈에 밟힐 뿐이라던 그를 나는 만류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복음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할 것인가? 그의 삶이요 인생이었다. 복내 암센터를 울려퍼지던 그가 부르던 잔잔한 찬송가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지쳐있는 그의 몸을 붙잡고 기도하려던 나를 향하던 눈빛에는 맑은 생명수가 흐르는 예수그리스도의 표정이었기에 나는 그에게서 어떤 일말의 죽음도 예견할 수 없었다. 차오르던 복수를 아무것도 아니라며 주위를 안심시키던 그는 터치전도법 전국 세미나를 위해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그곳을 향해 갔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총신대 신대원 86회 51세의 신경직 목사가 남긴 것

▲ 감암 판정이후 복내 전인치유센터에서 기거하며 그나마 자신의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소화기내과 전문의인 서강석 박사의 도움으로 자신의 간암의 상태를 충분히 파악하고 판단하고 있었던 신경직 목사    ©김경수


2012년 4월 청천병력같은 간암말기를 선고받았지만 바뀐 것이 없었다. 다만 그의 주거지가 전라남도 보성 복내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그는 여전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광주, 전주, 여수로 복음화 행전을 감행했다. 가는 곳마다 그는 예수님의 터치를 간절히 기도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민족복음화의 열정에 미쳐버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았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그에게서 마치 초기선교사였던 오웬의 모습을 보았다. 폐렴과의 사투를 벌이다가 끝내 오지의 땅에 영면한 오웬 선교사의 흔적을 그에게서 보았다.

▲ 언제나 그곳에 가면 그자리에 서있는 한결같은 사람 신경직 목사를 만날수 있었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예수님의 터치가 남아 있었다. ©강경구
그래도 살아 열광을 돌리고 싶어했던 신경직 목사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죽음의 그늘을 오직 복음 하나로 막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7월 13일 오전 갑자기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있다. 이제 누가 그의 열정과 복음화의 열망을 이어갈 것인가? 전국집회를 마치고 귀가하던중 천안 순천향 병원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터치가 아니었을까? 장례 발인예배는 7월 16일(월) 오전 부천 대성병원 영안실 (032-610-1154)에서 있다. 가장 사랑한다던 아내 최정인 사모를 소개하던 그의 해맑은 눈빛이 눈물나도록 그립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트위터페이스북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밴드구글+
기사입력: 2012/07/14 [18:30]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