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기사글

한국 교회를 향한 포사이드의 모범(2)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1. 31. 12:22






한국 교회를 향한 포사이드의 모범(2)
“나환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강경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포사이트 선교사는 5년간 한반도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아와 과부 그리고 한센병 환자를 위해 목숨을 건 사역을 펼쳤다.     ⓒ 강경구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3-4].”

포사이드가 지났던 길은 검정 조랑말을 타고 60마일이나 되는 머나 먼 길이었다. 목포에서 무안, 나주를 지나는 4월 초입으로 섬득한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었을 길이었다. 인가가 드물었을 한적한 길, 영산강과 나란히 때로는 뒤로하고 호젓한 길을 거슬러 효천역까지 동료였던 오웬 선교사의 위급한 폐렴을 치료할 일념으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그러던 그 앞에 한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련한 환자가 추위와 고통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누구를 위한 선행인가? 한국기독교 130년이라는 거대한 흐름앞에 서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포사이트는 묻는다. 계절은 봄을 지나고 초여름이 한창인 지금, 백년이 넘은 양림동산엔 노오란 수선화의 무리들이 곱게도 피고 지고 있다. 희망을 주는 색감으로 멀리 무등산을 마주하는 노란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희망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기반이 되고 있는 희망이라면 말이다.

의료선교의 새 장을 연 포사이트

▲ 광주 양림동에 가면 만날 수 있는 포사이트의 삶과 행적은 늘 가보고 깊은 그림움을 준다.     ⓒ 강경구
포사이트 선교사는 5년간 한반도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아와 과부 그리고 한센병 환자를 위해 목숨을 건 사역을 펼쳤다. 1873년 12월 25일 켄터키주 머서주에서 출생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졸업했고, 1904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한국에 파송되기전 쿠바와의 전쟁기간동안 군의관으로 활동했으며, 제대후 병원 근무중 뉴욕의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실천하기도 했다. 주머니안에 있는 돈을 빈민들에게 다 써버릴 때가 많았다. 뉴욕에서의 수련과정을 마치고 캔터기 주 랙싱턴으로 돌아와 병원을 개업했지만 불타는 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1904년 8월 10일 배에 올라 9월 29일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에서의 첫 사역은 고아들을 위한 무료 의료 봉사였다. 전주예수 병원 2대 원장으로 그는 당시 말골(당시 동학혁명이 발발했던 말목장터 근방)마을에서 무장한 괴한들의 칼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주다가 그 역시 총칼로 무장한 괴한에게 습격당해 귀가 잘리고 측두골이 깨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고 후유증은 그의 남은 삶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치료차 미국으로 갔다가 l908년 3월 말에서야 다시 목포로 파송됐지만 이 소식을 접한 전주지역 사람들은 그의 목포행을 적극 반대하며 다시 전주로 보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1000장의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병든자, 노약자, 버림받은 자, 나환자를 위해 주어진 삶을 살다간 포사이트에게 전주 지방 관찰사에서부터 지게꾼에 이르기까지 1000명이 낸 탄원서에는 충직하고, 사랑스럽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포사이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45세의 나이에 한국에서 걸린 풍토병이 사망 원인
▲ 여수 애양원 병원 뜨락에 호남 선교 100년이 넘는 시간을 기념이라도 하듯 묵묵히 여수와 호남 땅을 바라보고 서있다.     ⓒ 강경구
그는 한국에서의 사역 도중 스프루 라는 풍토병에 감염되어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장 통증과 두통이 그를 괴롭혔지만 병중에도 7년간 미국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한국 선교에 대한 당위성과 한센병으로 고생하는 광주의 환우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귀를 잘린 후유증과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 5월 9일 45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광주 한센병원의 환자들이 그를 못 잊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금액으로 9척 크기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포사이트 선교사의 비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포사이트 선교사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에 감동한 한센병 환자들이 밤시간을 이용해 광주에서 여수 애양원까지 비석을 옮겨갔다는 것이다.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인 양국주 선교사는 “포사이트 선교사가 별세한 뒤 기념비는 원래 광주에 세워졌지만 1926년 광주 시설로는 늘어나는 나환자 수를 감당할 수 없어 여수에 있는 율촌면에 새 나환자촌이 만들어졌고, 그때 나환자들이 비석을 일주일간 지고 메며 130㎞를 걸어 그것도 밤시간만을 이용해 여수까지 옮겼습니다. 바로 포사이트 선교사의 숭고한 삶을 기념하고자 한 것이죠.”라고 말했다.
▲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습으로 포사이트에 대한 사랑에 답장을 보내준 것이다.     ⓒ 강경구
그 머나먼 길... 광주에서 당시 여천군 율촌면까지 밤낮을 걸었을 한센병 환자들의 마음안에는 무슨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포사이트가 하늘나라로 떠난 1918년 이후 한센인들의 가슴안에 남아있었던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포사이트의 삶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을 비석을 이고 지는 기나긴 행렬을 만들었던 것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습으로 포사이트에 대한 사랑에 답장을 보내준 것이다. 그 기념비는 여수 애양원 병원 뜨락에 호남 선교 100년이 넘는 시간을 기념이라도 하듯 묵묵히 여수와 호남 땅을 바라보고 서있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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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5/16 [18:14]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