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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선교 여전도연합회 역사 밝혀

투데이뉴스코리아 2018. 1. 29. 20:46






호남선교 여전도연합회 역사 밝혀
양국주 선교사, 광주제일교회 여전도회 헌신예배에서 문건 제시
 
강경구
광주제일교회(권대현 목사) 1-4여전도회 헌신예배서 여전도회 역사성 제시
▲ Serving the people 선교회 국제대표인 양국주 선교사가 광주제일교회(권대현 목사)에서 열린 제 1-4여전도회 헌신예배를 통해 한국여전도회 역사에 대한 기록물을 제시하고 있다.     ⓒ 강경구


지난 7일 호남선교사 연구가인 Serving the people 선교회 국제대표인 양국주 선교사가 광주제일교회(권대현 목사)에서 열린 제 1-4여전도회 헌신예배를 통해 한국여전도회 역사에 대한 기록물을 제시하며 “여전도연합회의 주도적인 사업전개에 앞서 역사적인 뿌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1920년대의 한국과 광주의 사회상황에 대한 연구들이 광주의 어머니교회인 광주제일교회를 통해 더욱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선교사에 의하면 1904년 광주제일교회가 태동하던 당시 광주의 인구는 7천명이었지만 1925년에는 20만명으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광주와 관련한 다른 사료에 의하면 1910년 당시 광주의 인구가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하여 2,500호, 약 10,000여명이었고, 교회는 1926년 4개 교회에 2,000여명의 성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 선교사에 의하면 이보다 앞선 1904년 광주 인구는 7,000명이었지만 유진벨, 오웬, 서서평, 유화례 같은 미국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화산 같은 삶을 다하고 떠났던 30년 뒤 양림동만 해서 사만에서 오만명을 바라보는 인구가 양림산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갔다는 것이다.
 
양 선교사는 최근 공개된 ‘도마리아 선교사의 보고서’를 토대로 1908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학생수가 1924년 2,991명으로 늘었으며, 1925년에는 31개의 주일학교로 성장했다고 했다. 또한, 1937년 광주제일교회 전신인 금정교회 교인수는 175명, 양림교회 450명, 중앙교회 150명, 서현교회 150명, 송정교회 200명, 목포양동교회가 1,300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45년 들어 교인수가 급감하고 있다며 당시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 핍박이 주원인이라고 했다.
 
양 선교사는 이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한국 여전도회 역사의 시원을 1925년에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의해 발간된 한국 여성인 김필례에 의해 쓰여진 <한국 여성운동 개괄>이라는 팜플렛을 통해 보고된 “더 연약한 그릇이 더욱 강하게 변하여”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 공개했다. 

 여전도회 창립의 역사성과 의미
▲ 1925년 존재했던 세 교회인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 양림교회, 서현교회에 이어 북문교회(현, 광주 중앙교회)를 나열하고 있는 양 선교사     ⓒ 강경구
‘1908년 서늘한 10월 어느 날...’로 시작되고 있는 김필례 보고서를 통해 사실상 부인조력회가 시작되었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문건에는 광주 YMCA에 의해 시작된 야학(夜學)과 YWCA의 태동까지 이야기되고 있으며, 이어, 1927년에는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선교사들의 연례 모임이 열렸을때 로이스 스와인하트(Swinehart)가 부인조력회의 아름다운 출발과 사역의 성과들을 감사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했다고 밝혔다. 스와인하트의 글에는 “쉐핑의 여성에 대한 믿음은 아주 깊었습니다. 그녀는 교회들과, 회중들, 그리고 여러 그룹들을 찾아갑니다. <원주회>를 만들고 잠결에도 조력회를 꿈꿉니다”였다. 잠결에도 오로지 한 가지.... 여성들의 기도와 신앙의 불꽃을 염원했을 서서평의 삶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양선교사에 의하면 107년 전 ‘여성조력회’는 10년간의 산고 끝에 교회를 열심히 도왔고, 가입자수가 7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 년에 육 개월씩 지방으로 사역을 나갔고, 매월 음력 셋째주 월요일 저녁에는 멀리까지 복음을 들고 나갔다고 했다.

1921년엔 광주지역만을 전담하는 전도부인 외에 한명의 선교사를 제주도로 파송할 수 있을 만큼 선교후원회의 조직력을 다졌다. 그리고 1923년에 들어서는 쉐핑에 의해 더욱 정교하고 짜임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 13개의 모임(원주회-circle)에서 22개의 모임으로 확충되고, 두 명의 전도부인과 교회 목사의 월급의 절반을 모금하기에 이른다. 1925년 7월 당시 광주에 있는 교회들, 즉 금정, 양림, 그리고 향교(서현교회)가 오웬기념각에서 저녁 9시에 음악프로그램으로 노회원들을 환영하고 차와 함께 간단한 음식을 대접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25년 존재했던 세 교회인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 양림교회, 서현교회에 이어 북문교회(현, 광주 중앙교회)가 역시 쉐핑에게 조력회 조직을 요청했다는 보고에서 호남선교사의 한 획을 그었던 여전도회 창립의 역사성과 의미를 되새기자고 했다.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고구려대학 대체의학 겸임교수/노벨요양병원 보완대체의학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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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2/21 [23:45]  최종편집: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