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사글

일본 속의 선한 일본인

투데이뉴스코리아 2010. 8. 30. 16:45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체취를 찾아 목포 공생원을 가다
 
강경구
우리에게 일본은 불가피한 이웃 불가피한 우정... 

 
"서울과 도쿄를 본다/ (…) 불가피한 이웃이다/ (…) 불가피한 이웃이란/ 불가피한 열전이 아니라/ 불가피한 냉전이 아니라/ 불가피한 우정/ 불가피한 화목이 있어야 한다/ (…) 무효!/ 이로부터 우정의 천년이 있다/ 앞이 있다/ 거기로 가는 길이 있다/ 오늘 그 길의 첫걸음이 여기 있다."
▲ 윤치호 전도사의 좌우명     © 뉴스파워 강경구

29일 오전 비오는 서울 충무로. 하늘이 슬퍼서 인가? 사람이 슬퍼서 인가? 세종호텔 로비에 울려 퍼지는 한국의 시인 만인보의 작가 고은 선생의 자작시가 마음을 울리고 대한민국을 울려나가고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이웃이기에 우리에게는 반갑지 않고, 어색하고, 다시 만나기가 싫은 이웃 일 수 있다. 그 이웃에게 선포하는 무효선언이 빗속을 뒹구는 늦여름의 마른 나뭇잎처럼 아쉽고 축 젖어 있다.
꼭 100년간 우리는 이웃을 향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하고 주장하고 심경을 토로하고 때로 부르짖었지만 늘 그대로의 싫은 이웃일 뿐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의 그들을 향한 말과 주장이, 심경이 한국 정치판의 상황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고,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이 부끄럽고 아쉬울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를 향한 지배논리의 야욕을 넓혀가며 영토 확장의 야심을 현실화 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좌파도 우파도 아닌 국익에 대한 넓은 마음과 과거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진정한 마음의 사죄를 한목소리로 얻어내는 것이다. 사죄란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 곧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빗속의 긴 침묵행진 속에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날 한일강제병합이라는 구조적 모순 안에 투영되는 기독교 안의 슬픈 역사, 순교와 분열이라는 아픈 과거 또한 빗속에 묻혀 흐르는 것만 같다. 

  
윤치호 전도사의 치열한 삶과 일본인 윤학자 여사의 뜨거운 사랑


▲ 전남 목포시 죽교동의 공생원은 유달산을 등지고 목포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흉상뒤로는 일명 오부치 매화나무가 여름을 나고 있다.        © 뉴스파워 강경구
 
윤치호 선생은 일명 거지대장으로 불리웠다. 14세의 소년가장이기도 했던 그에게 희망을 준 것은 1924년에 만난 미국인 여선교사 마틴(jullia matrin)이었다.

윤치호 선생은 마틴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전남 목포에서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 하다가, 1928년에 공생원을 설립하였다. 공생원의 뜻은 ‘같이 살아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1920년 한일 강제 병합이후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궤도 안으로의 진입을 온 몸으로 거부하며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에서, 김좌진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불과 1년 전인 1919년 고종 황제 붕어에 이은 3·1 만세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을 털어내는 희망의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까지는 25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24년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좋은 날>의 슬픈 일상이 바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다. 1920년대 전반기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이 소설의 주내용이었으니 당시 목포의 삶은 어떠했겠는가?
전남 목포의 경우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생긴 유랑아들이 많았는데, 윤치호선생은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들을 보면서 사명감을 느끼고,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공생원의 출발이다. 

  
한일강제 병합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씨앗이었다. 


▲ 과거 일본의 끝없는 침략본성은 이미 조선의 역사속에서도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목포와 목포 앞바다를 주시하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서서     ©뉴스파워  강경구
 
6월 한국 전쟁시 목포에 진입한 북한군은 윤치호선생이 이승만 정권에서 구장(區長)을 역임했다는 이유 및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회부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변호로 무죄로 풀려났다고 한다. 한편, 몇 개월 후 북한군 퇴각 후 반대로 한국군에 의하여 북한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스파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주변 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윤치호에게 중요했던 것은 공생원 식구들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1951년 1월 석방된 그는 식량구호 요청을 위해 전남 광주에 갔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이야 40분 거리이지만 당시는 꾀나 먼 거리였을 것이다.
공생원의 운영이 끝나야 할 순간이었지만 그의 일본인 아내였던 윤학자( 田內千鶴子) 여사 및 그 자손들이 윤치호선생의 뜻을 이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공생복지재단이고, 이 재단은 현재 서울과 목포,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했던 윤학자 여사는 1930년대에 한국에 와서 윤치호 전도사가 운영하던 공생원 아이들에게 일본어와 음악교사로 자원봉사를 하던 중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내일은 걱정이 없다.(윤치호 전도사의 좌우명)


▲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은 한 시대를 관통했다.     ©뉴스파워 강경구
 
사랑 하나로....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田內千鶴子) 여사의 아름다운 사랑이 목포시 죽교동과 대반동의 유유한 바다를 타고 흘러내린다. 유달산 낙조대는 남도의 바닷가를 지는 하루 해를 묵묵히 반추하고 공생원의 꽃들은 바람 속을 정갈하게 흔들거린다.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로 약 30년간 3000명의 아이들을 키워냈던 일본사람 윤학자 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그녀가 폐암으로 숨진 1968년 목포 최초 시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뤘고 3만여 명의 조객이 모였다고 한다. 언론은 당시를 목포가 흐느껴 울었다"는 표현을 썼다.

열아홉의 젊은 나이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외쳤던 윤치호 전도사의 삶이 그립고 아쉬운 것은 열두살 때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된 이후 가난과 독학의 고난을 이겨내고 예수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일제시절 48차례에 걸친 연행·구금·고문에 이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경찰 연행과 고초를 묵묵히 이겨냈다는 것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굴욕과 치욕의 역사 속에 한줄기 빛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음이다. 

 

▲ 공생원의 홈페이지는 www.mksw.org 이다. 역사속의 장면들은 부족했지만 공생원의 이웃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 뉴스파워 강경구

▲ 유달산 조각공원의 네델란드 케빈 반 블락의 2009년 <서로 바라보기> 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확인하고 있다 이는 진정으로 나 임을 묻는다로 설명되고 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 뉴스파워 강경구
▲ 오포대는 한일강제병합 1년전 1909년 4월 목포시민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지방문화재료 제138호다. 1913년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고 조선식 대포는 태평양 전쟁을 위해 일본정부가 공출해 갔다.     © 뉴스파워 강경구


뉴스파워 광주전남 주재기자/의학박사(수료),대체의학석사/조선대학교 대체의학과 초빙교수/광주여자대학교/송원대학교/서영대학/고구려대학/빛고을노인건강타운/효령노인건강타운 강사
 
기사입력: 2010/08/30 [01:41]  최종편집: ⓒ newspower